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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59 올라갔는데, 이미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렸다.(『梅泉野錄』, 198 200-201쪽). 나주의병은 진위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으나, 광주에 집결한 장성의병은 신기선에 의해 해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우만은 담양부사였던 민종렬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이들을 신기선이 적극 비호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우만은 민종렬의 협조를 얻어 광주를 중심으로 의병의 세력을 확산시켜 북상할 계획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광주향교는 전기의병의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고, 광주향교의 齋任을 맡고 있던 박원영이 그러한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 때문에 박원영은 주동자로 지목되어 진위대에 의해 희생되었을 것이다. 103) 이로써 장성의병은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창평출신의 노사문인 李承鶴은 “송사는 입산하여 고사리나 뜯고, 식재는 구름처럼 이리저리 떠돌다 서로 흩어졌으며, 홀로된 나는 외로이 병이 들어 이웃과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104) 라는 글을 이건창에게 보낸 바 있다. 이상과 같이 노사학파의 핵심인물인 기우만은 장성의병을 주도하였다. 그는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성 리 학 적 道 를 수 호 하 는 것 을 우 선 시 하 는 경 향 이 강 하 였 다. 105) 그 를 비 롯 한 노 사 학 파 의 의병봉기자들은 단발령의 반대, 일본의 구축, 개화정책의 반대, 제도의 복구 그리고 국왕의 환궁 등을 표방하였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들은 북상근왕을 추진하였으나 국왕의 해산조칙에 따라 의병을 부득이 해산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사학파가 주도한 장성의병은 반개화·반침략적 근왕의병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2. 나주의병 나주의병은 전라도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장성의병과 함께 양대 호남의진의 하나로 주목받았다. 106) 나주의병의 경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양반 유생보다는 향리층의 주도적인 역할과 그들이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선 수성군측의 핵심세력이었기 때문이다. 107) 이후 나주의병에 대해서는 향리층이 의병을 주도한 배경을 분석한 연구로 진전되었다. 108) 103) 진위대가 광주로 향하자, 박원영은 기우만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송사집」, 『자료집』 3, 35쪽). 이들은 서로 自重하며 몸조심할 것을 걱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우만은 피신했고, 박원영은 뒷수습을 책임졌던 것 같다. 박원영이 참변을 당하자, 기우만은 훗날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祭朴周玉源永文」, 『송사선생문집』 4, 경인 문화사, 489-493쪽). 한편 신기선은, 이겸제가 전주진위대장 김병욱을 파견하여 박원영을 梟首한 것은 朴이 기우 만의 세력이기 때문이라 하였다(「奉使日記」, 『양원유집』 하, 301쪽). 104) 이승학, 「與李寧齋」, 『청고집』 상, 57ㄱ쪽. 105) 홍영기, 「舊韓末 湖南義兵의 倡義性格」, 『湖南文化硏究』 22(1993), 51쪽 및 오영섭, 앞의 책, 245쪽. 106) 홍영기, 「1896年 羅州義兵의 結成과 活動」,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下(일조각, 1994) ;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제1장 제1절 나주의병(일조각, 2004) 참조. 107)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31-139쪽. 108) 배항섭, 「1896년 나주 향리층의 의병주도와 그 배경」, 『대동문화연구』 51(2005).----, 「중·후기 의병전쟁 시기 나주 지역 향리층의 동향」, 『한국사학보』 2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