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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동하기도 했다. 제천과 강릉에서 각각 활동하던 의병장 柳麟錫과 閔龍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해산에 반발하며 ‘선비들과는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며 재기를 모색하거나, 활동중인 다른 의병으로 옮겨 활동한 경우도 있었다. 장성의병의 선봉장을 맡았던 기삼연과 안동의병의 중군장을 맡았던 金道鉉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병들은 국왕의 해산조칙에 따라 1896년 봄을 전후하여 해산하였다. 결국 나주의병은 음력 2월 26일에서 27일 사이에 해산하였고, 98) 이어 광주에 주둔 중이던 장성의병 역시 신기선의 권유를 받아들여 음력 2월 28-29일경 해산하였다. 99) 따라서 음력 2월 30일에 광주에 집결하기로 한 약속은 무산됨으로써 이른바 光山會盟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100) 한편, 친위대를 지휘하던 李謙濟는 진주로 가면서 전주진위대를 광주와 나주로 파병하여 주모자의 검거에 나섰다. 101) 전주진위대는 前 潭陽府使 閔種烈을 체포하였으며, 광주에서는 향교의 校任을 맡고 있던 박원영이 처형되었다. 102) 특히, 나주의병의 주도인물은 상당수가 희생되었는데, 이를테면 해남에서 압송되어온 해남군수 鄭錫珍을 비롯하여 金蒼均과 金晳鉉 父子 등이 처형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梅泉 黃玹은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의병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深衣와 大冠 차림을 하였고, 서로 만나면 揖讓하고 길을 나설 때도 차례로 줄을 지어 걸었다. 이들은 군량이나 병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紀律도 없었으 므로 이들을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광주로 나아가 주둔하고 있었다. 마침내 海南郡守 鄭錫珍이 李謙濟에게 살해되자, 기우만은 두려워하여 의병을 해 산시키고 도망하였다. (중략) 이겸제(전주진위대 金秉旭 ; 필자주)가 나주로 들어가 해남군 수 정석진을 살해하자 기우만은 도주하였고, 담양군수 민종렬은 피체되었다. (중략) 우만은 석진이 죽는 것을 보고 광주로부터 의병을 해산한 후 도망하였다. 이때 신기선은 호남에 있 으면서 기우만을 강력히 비호하였던 까닭에 체포하지 못하였다. 종렬과 우만이 내통한 사 실이 삽시간에 알려졌으므로 겸제는 이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민종렬의 동생 종묵이 높은 관직에 있었고 또한 사람들이 민종렬이 주모자가 아니라고 달래자 드디어 이겸재는 서울로 98)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90쪽. 99) 변상철 외, 『봉서·봉남일기』, 278쪽. 100) 전라도의 연합의병단체인 光山會盟所가 결성되어 일정한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견해도 있으나(『의병들의 항쟁』, 1980, 83-84쪽),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광주에서 집결하려던 광산회맹소는 조직되 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101) 신기선, 「奉使日記」, 『陽園遺集』 下, 301쪽. 102) 「송사집」, 『자료집』 3, 33쪽. 한편, 민종렬이 명성왕후 지지세력으로서 나주의병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있다(이상찬, 『1896년 의병운동의 정치적 성격』<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 59-60·160-162쪽). 그런데 민종렬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목사로서 나주읍민과 더불어 동학농민군의 격퇴를 주도함으로써 나주에서 신망이 높았던 것 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1895년 9월에 담양부사로 결정되었으며, 적어도 음력 11월 중순 이전에 담양으로 부임하 였다. 그가 담양부사에서 免官된 1896년 1월 13일 이후에 담양에서 나주로 돌아왔다는 기록도 전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1896년 음력 정월을 전후하여 시작된 나주의병을 민종렬이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