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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57 祭祀지냈다. 93) 그후 기우만은 나주에서 광주로 移陣하면서 전라도의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음력 2월 30일에 광주에 집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94) 당시 기우만은 광주로 義陣을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생은 “光山이 호남의 중심지이니 처음 일하는 마당에 있어 지리적 조건이 진실로 마음에 맞다”하 고, 먼저 글월을 만들어 광산의 여러 의사에게 통고하였는데, 이제 와서 이주하였다.(「송사집」, 『자 료집』 3, 30쪽) 즉 송사는 호남의 중심지라는 광주의 지리적 이점을 높이 샀던 것이다. 이는, 전라도 각 고을의 의병들이 편리하게 집결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광주였음을 알려 준다. 이처럼 기우만은 광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을 계획이었다. 그가 광주의 유림에 보낸 글을 보면 그러한 내용이 드러난다. 95) 이 글에서 기우만은, 광주가 사림의 ‘淵海’이자 ‘忠義의 古家’라는 점을 적극 강조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기우만은 광주의 유림을 기반으로 삼아 의병에 투신케 해서 서울로 북상할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은 처음에는 향교를 중심으로 한 邑治의 중심지를 점거하였다. 이들은 지방의 거점을 확보한 다음 군사를 모아 근왕하기 위해 북상할 계획이었다. 1-4) 장성의병의 해산 한편, 宣諭使와 官軍이 의병을 해산할 목적으로 전주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기우만은 전주에 파견된 親衛隊에 勤王斥倭하자는 曉告文을 발송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개화정책의 반대와 국왕의 還宮, 단발령 철회 등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의병을 해산하라는 勅諭를 발표하고, 申箕善을 南路宣諭使, 李道宰를 東路宣諭使에 임명하였으며, 96) 이어 北路宣諭使에 李鍾健을 임명하였다. 정부는 宣諭使를 파견하여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친위대를 파견하여 군사적 탄압도 병행하였다. 예컨대, 남로선유사 신기선은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호남의병을 비롯한 경기·충청지역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1896년 3월초부터 5월 중순까지 선유활동을 펼쳤다. 97) 당시 의병장들은 대부분 양반 유생이었던 관계로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이들이 성리학적 勤王理念에 충실한 유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해산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국경을 넘어 만주로 93) 「송사집」, 『자료집』 3, 28쪽 및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9-80쪽 참조. 94) 변상철 외, 『鳳棲·鳳南日記』, 278쪽과 「松沙集」, 『자료집』 3, 29-30쪽 및 김정, 앞의 논문, 203쪽과 이상식, 앞의 논문, 101쪽 참조. 95) 기우만, 「輪示光山諸壯士」, 『松沙先生文集』 1. 96) 『舊韓國官報』 1896년 2월18·27일자 號外 「勅諭」. 97) 신기선, 「奉使日記」, 『신기선전집』 하(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