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page

15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기우만은 노사의 친손자로서 晩衍의 셋째 아들이나 두 형이 모두 일찍 죽었다. 72) 그리하여 그가 家學을 잇게 된 것이다. 그는 조부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특히 위정척사사상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그리고 아관파천이 이어지자, 그는 호남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단발령의 충격이 의병봉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단발령이 내린 후에는 哭聲이 하늘을 진동했다. 사람마다 憤怒하여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 형세가 장차 격변하자, 왜놈들이 군대를 무장시켜 대기시켰다. (중략) 서울에 온 시골사람들은 문밖을 나섰 다가 상투를 잘리면 모두 그 상투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통곡을 하며 성을 빠져 나갔다. (중략) 錦江 을 차단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머리를 억지로 깎으므로, 길을 다니는 행인의 발길이 거의 끊기었다. 이때부터 온 나라가 솥처럼 들끓었으며,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黃玹, 『梅泉野錄』, 191-192쪽). 위의 인용문에서 단발령이 의병봉기의 가장 큰 원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우만 역시,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머리를 깎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망하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낫다” 73) 라고 하며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에도 이러한 인식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며, 단발령이 전기의병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74) 물론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킨 사상적 배경은 위정척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이후 전라도에서는 기정진과 같은 걸출한 성리학자가 배출되어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바 있었다. 75) 기정진는 스승도 없이 거의 독학으로 성리학의 독특한 이론을 체계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76) 그가 주장한 성리학설에는 여느 유학자와 전혀 다른 독자적인 사상체계가 담겨져 있으며, 실천력이 강한 특징을 지녔다. 77) 이러한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특히 그의 제자이자 친손자이기도 한 기우만에 의해 전수되었다. 78) 창평의 高光洵은 그를 노사학파를 이끄는 領袖로서 72) 「행장」(조성가 찬), 『노사선생문집』 三 참조. 73) 기우만, 「松沙集」, 『독립운동사자료집』 3, 25-27쪽 참조. 74) 전기의병의 격문류 50건을 분석한 權寧培는 단발령직후에 발표된 격문이 37건으로 74%나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 았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토대로 전기의병의 결정적 동인이 단발령이었다고 주장하였다(『檄文類를 통해본 舊韓末 義兵 抗爭의 性格』,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1995, 23-5 43쪽). 한편, 吳瑛燮도 단발령이 전기의병운동을 촉발시킨 근본요인으 로 보았다(『華西學派의 思想과 民族運動』<국학자료원, 1999>, 114-116쪽) 75)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제1부 제2장 호남의병과 노사학파, 76-105쪽 참조. 76) 玄相允, 『朝鮮儒學史』(1949 ; 民衆書館, 1977년 6판), 368쪽. 77) 기정진의 성리학 사상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는 安晉吾, 『奇蘆沙의 理哲學에 관한 硏究--理一分殊의 哲學體系를 中心으 로--』(東國大 博士學位 論文, 1988)를 참고할 것. 78) 현상윤, 앞의 책, 4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