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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51 義陣은 莞島와 海南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黃俊聖 의병부대에서 찾아진다. 66) 이상과 같이 후기의병은 安民을 더욱 강조하였다. 67) 바꾸어 말하면 이는, 일본 제국주의 침탈이 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할만큼 바로 눈앞에 닥쳐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당시 광주- 전남 의병들은 緣故地域을 중심으로 향토를 수호하는 활동에 비중을 두었다. 그것은 연고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해야만 자신들의 활동 역시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은 일제의 갖가지 침탈과 그 속에서 겪는 주민들의 慘狀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방향으로 활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한편, 광주-전남 의병의 역사적 연원은 왜란과 호란 당시의 의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한말의 광주-전남 의병이 왜란과 호란 당시 광주-전남 의병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한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글들이 그러한 면모를 알려준다. 1) 하물며 臣(高光洵 : 저자주)의 先祖는 忠烈公 高敬命과 孝烈公 從厚, 毅烈公 因厚 등 三父子가 임 진왜란 당시 순절하였던 까닭에 세상에서는 忠孝의 古家라 부릅니다. (중략) 臣은 곧 毅烈公의 祀孫 입니다(高光洵, 『鹿川遺稿』, 「丙申疏」). 2) 옛부터 호남의 義聲은 가장 높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忠勇이 높아 霽峰 고경명과 重峰 趙憲 등이 錦山에 들어가 순국하였으며, 또한 三壯士도 진주에서 운명함으로써 疆域을 회복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편책』 82. 「大將曺京煥祭文」, 『독운사』 1, 682쪽). 3) 호남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래로 忠義의 寶庫이다. 이에 나는 힘을 다해 먼 곳으로부터 달려왔 다. (양회일, 『杏史實紀』(1950) 권 4, 「副統將」). 위의 인용문에는 왜란과 호란에 참여한 광주-전남 의병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이 잘 나타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호남지역 인사들이 의병대열에 적극 동참한 사실에서 한말의병의 정신적 근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1)항은 전남 창평에 거주한 의병장 高光洵의 가문에 관한 내용이다. 2)항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광주-전남 의병의 활동목표와 활약상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3)항은 출신지를 잘 알 수 없는 李光彦이 광주-전남 의병에 참여하면서 했던 말이다. 이로써 타 지역에서조차 호남지역이 忠義의 寶庫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왜란과 호란 당시의 의병에 적극 동참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의병활동을 정당화 내지 합리화한 경우는 매우 66) 拙稿, 「舊韓末 全羅南道 島嶼地方 義兵에 대한 一考察」, 『東亞硏究』 21(1990). 67) 김의환과 강재언은 이 시기 의병의 목적을 國權防衛戰爭으로 보았으며(김의환, 『의병운동사』, 284쪽과 강재언, 「反日義兵 運動의 歷史的 展開」, 『朝鮮近代史硏究』(1970) ; 『韓國近代史硏究』(한울, 1982), 344쪽 참조), 조동걸 역시 國民戰爭으로 파악하였다(앞의 책, 73-74쪽). 그리고 홍순권은 중기의병과 후기의병으로 시기를 나누지 않고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 터 1909년까지의 광주-전남 의병이 민중운동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 硏究』<서울 대 출판부, 1994>, 333-3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