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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49 신분이 혼재되어 있다. 김준과 김율,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등이 전형적인 유생이라면, 김동신과 임창모, 박도경은 중인에 해당되고, 안규홍은 머슴출신의 전형적인 빈농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의목표 역시 그들의 다양한 신분만큼이나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이나 의사를 기록으로 남긴 의병장들은 대부분 유생출신들이 많은 편이다. 이들이 남긴 대표적인 기록을 통해서 그들의 거의목표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유생들은 春秋의 義理思想에서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아래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九歲時 비로소 學窓에 就하여 二十四歲까지 專心 學事에 就하고 (중략) 春秋左氏傳을 번함에 當하여 마치 韓國의 現狀이 戰國時代에 酷似하여 韓帝는 있으나 이름뿐 (중략) 일찍이 壬辰의 役에 일본이 한 국을 犯하려고 왔던 사실과 같이 전혀 義兵의 힘으로서 今日까지 韓國을 維持함을 得함이라고 盲信 (『編冊』 155. 「義兵將 全海山取調書」, 『獨運史』 1, 796-797쪽). 任實出身으로 靈光-咸平 등 전라남도의 中西部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의병장 全海山은 춘추의 의리사상에 영향을 받아 거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0) 아마도 유생출신 의병장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위정척사적 입장을 계속 고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의병장 이석용인데, 그는 任實-鎭安 등 전라북도의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61) 그는 擧義 당시인 1908년 3월에도 ‘나라는 잃을지라도 義는 잃을 수 없으며, 사람은 죽더라도 道는 망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위정척사적 성향이 강하였다. 6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倡義의 목적이 전적으로 ‘爲國爲民’에 있다고 말했다. 63) 그는 의병의 급선무는 국가를 위하고 인민을 안정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64) 한편, 당시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皇城新聞 1907년 8월 20일자 논설 「嘆地方民情」에 哀哉라. 我韓民이여 數十年 貪官汚吏의 手中에 剝皮割肉하던 生民이오. 數十年 土豪勢族의 眼前에 低頭縮眉하던 生民이오. 數十年 火賊黨·活貧黨에 傾家蕩産하던 生民이오. 數十年 東學·義兵에 遊 60) 의병장 전해산에 관한 연구로는 姜吉遠의 「海山 全垂鏞의 抗日鬪爭」(『歷史學報』 101, 1984)과 이태룡 엮음의 『의병장 전해산』 상/하(삼조출판사, 2010)를 참고하라. 61) 의병장 이석용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姜吉遠, 「韓末 湖南義兵將 靜齋 李錫庸의 抗日鬪爭」, 『圓光史學』 2(1983). 崔根茂, 「義兵大將 李錫庸에 관한 硏究」, 『全州敎大 論文集』 21(1985). ______, 「李錫庸의 思想에 關한 硏 究」, 위의 책 22(1986). 62) 『편책』 45. 「湖南倡義所大將李錫庸移文」 ; 『獨運史』 1, 653쪽과 「義令十條」·「陳大義疏」, 『大韓義將 湖南倡義錄』 권 1 참조. 63) 「揭示列軍任長」, 『대한의장 호남창의록』 권 1 참조. 64) 「諭全國同胞」, 위의 책, 권 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