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page

14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과 外國之侵漁가 愈往愈甚하야 忿心이 繃中에 生不如死故로 被告가 蕩賣家産하야 以備軍需하고 自爲盟主 57) ”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호남지방에서 중기의병을 주도한 義兵將들은 대부분 유생이었지만 성리학적 道를 수호하기 위한 명분론을 극복하면서 反侵略的 保國義兵을 목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다른 지방의 의병장들도 性理學的 道의 훼손이나 단발조치를 성토하기보다는 대체로 ‘斥日’과 ‘保疆土’를 강조하였다. 또한 국가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당시 계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계몽계열은 實業을 장려해서 民力을 충실하게 해야만 保國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58) 다시 말해서 즉각적인 무력투쟁을 통해서 保國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병세력과는 방법론에서 달랐을 뿐 국권을 수호하려는 목표는 동일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중기의병의 거의목표는 反侵略的 保國에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59) 이는, 의병을 주도한 유생들이 국가적 현실을 자각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것은 이들이 지금 당장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주목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民族이나 民衆의 生存權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리라는 전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 安民志向의 후기의병 호남지방 후기의병의 起點은 1907년 10월에 봉기한 湖南倡義會盟所에서 찾을 수 있다. 1907년 7∼8월을 전후하여 정치적 상황은 숨가쁘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1907년 7월 19일의 高宗退位를 시작으로 韓日新協約(7.24. ; ‘丁未條約’), 軍隊解散(8.1.)이 이어져 政局은 혼란의 소용돌이였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의 정치적 위기가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호남지방에서는 전기의병이후 의병에 계속 참여한 奇參衍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었다. 이로부터 수많은 의병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1908∼9년 사이에 호남지방은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奇參衍과 高光洵은 전기의병이래 초지일관 의병을 주도해오면서 호남지방 의병운동계의 상징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후 대일투쟁 과정에서 순국하였고, 이어 새로운 의병장들이 다양한 계층에서 등장하였다. 후기의병을 주도한 새로운 의병장으로는 金準·金聿 兄弟, 金東臣, 全海山, 沈南一, 安圭洪, 李錫庸, 文泰瑞, 林昌模, 黃俊聖, 朴道京, 梁鎭汝, 楊允淑, 李起巽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에는 학식이 상당한 유생도 있으며, 中人 계층에 속하는 인물뿐만 아니라 머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57) 『舊韓國官報』 1907년 7월 11일자 司法 條. 58) 皇城新聞 1907년 5월 6일자와 10일자 논설 「保國論」 참조. 59) 김의환은 중기의병의 목적이 국권회복에 있었다고 파악하였으며(『義兵運動史』, 283쪽), 조동걸은 救國의 論理가 강조된 것으로 이해하였다(앞의 책,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