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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과 의병항쟁 13 기념사업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연구도 주목된다. 16)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이 글에서는 광주-전남의 동학농민혁명을 단계별, 권역별로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광주-전남의 농민군 활동을 알아보겠다. 그리고 집강소 시기와 제2차 동학농민혁명의 지역별 전개과정과 결과를 정리할 것이다. 끝으로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의 특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서술하고자 한다. 태평천국운동과 같은 유사한 농민운동과 비교 검토한 선행연구 17) 를 활용하여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농민운동의 역사적 위상을 밝히고자 한다. 18) 한편, 동학농민혁명이 종식될 즈음부터 시작된 한말 의병항쟁은 일제의 침략이 가중될수록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1895년 10월과 12월에 각각 자행된 명성황후시해사건과 斷髮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일어난 俄館播遷 등이 의병봉기의 주된 계기였다. 그후 1905년을 전후부터 자행된 일본의 일련의 국권침탈 사건--예컨대 을사늑약과 군대해산-- 등으로 말미암아 전국은 의병항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처럼 모든 산과 들이 의병과 일본 군경의 戰場화됨으로써 義兵戰爭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19) 비록 1910년 8월의 庚戌國恥를 전후하여 국내의 의병활동은 위축되었지만,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까지 의병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20) 따라서 한말의 의병항쟁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20여 년이상 줄기차게 반일투쟁을 전개한 의병의 규모조차 잘 알 수 없다. 의병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1907년부터 약 5년 동안 의병의 규모는 총 14만명 정도로 추산될 뿐이다. 21) 또한 일제는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학살된 의병의 숫자를 약 15,000명으로 집계하였다. 22) 이러한 통계만으로도 당시 의병의 규모와 심각한 피해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의병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獨立運動의 導火線 23) 으로 인식됨으로써 일찍부터 비교적 16) 『전남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전라남도 무등역사연구회, 2011). 17) 崔之淸, 「太平天國與東學運動比較硏究」, 『동학학보』 28(2013). 이 글은 태평천국과 동학농민혁명의 발생 배경과 목표 등 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서술하였다. 18) 강효숙,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한일 학계의 연구동향―홋카이도대학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두개골 발견이후 연구를 중심 으로--」, 『남도문화연구』 26(2014) ; 『지리산권 동학농민혁명』(2014). 이 글에서 강효숙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에 소장된 다양한 자료를 발굴, 분석하여 국제관계사 관점에서 이 사건을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을 제기 하였다. 19) 대한매일신보(한글판) 1907년 9월 5일자 「한국안에 젼쟁」 참조. 20) 趙東杰은, 의병항쟁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1914∼5년에 종식된 것이 아니라 3·1운동 직전까지 계속되었다고 주 장하였다. 즉, 최후의 의병장으로 알려진 蔡應彦이 체포된 1915년 7월 이후에도 의병들의 활동 사실이 상당히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 그와 같은 論旨를 편 것이다(「義兵戰爭과 3·1 運動의 關係」, 독립기념관주최 제3회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발표요지, 1989 ;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지식산업사, 1989>). 그런데 남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의병 의 종식시기를 대체로 1914∼5년경으로 이해한다. 21) 『朝鮮暴徒討伐誌』(이하 『토벌지』), 朝鮮駐箚軍司令部, 1913 ; 『독립운동사자료집』 3(이하 『자료집』), 1971, 부표 3, 827 ∼829쪽 참조. 22) 『暴徒에 관한 編冊』(이하 『편책』), (政府記錄保存所 所藏, 문서번호 88-19), 1121쪽. 23)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上海, 維新社, 1920) ; 『朴殷植全書』上(단국대 출판부, 1975), 4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