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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45 하여 한 번 몸을 바치려 아니하오리까(「松沙集」, 『자료집』 3, 25-27쪽). 위의 내용에 잘 드러나 있듯이, 기우만은 단발령의 철회·옛 제도의 회복·復讐討賊 등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국가의 멸망보다는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와 제도를 더욱 중시하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아울러 국왕의 命令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었음을 알렸다. 따라서 이들은 北上하여 勤王할 것을 목표로 倡義하려는 것이었다. 성리학적 道를 지키기 위해서는 곧 기존의 체제를 수호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倭亂과 胡亂時 勤王義兵을 일으킨 재지사족들과 거의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다. 한편, 나주에서는 기우만의 通文이 도착하자, 이 지역 유생들 역시 지지의사를 밝히면서 아래와 같은 통문을 기우만에게 전달하였다. 勤王하자고 이미 으뜸으로 외쳤으니 선비되고 누가 따르지 않으리오. (중략) 임진년의 깊은 원한을 수백년에 어느 날인들 잊겠습니까?(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68쪽).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유생들 역시 기우만이 勤王을 목표로 擧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기우만을 비롯한 장성과 나주의 유생들은 勤王을 목표로 거사를 추진하였다. 42) 따라서 그는 의병을 ‘勤王之師’라 지칭하였으며, 43)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高光洵 역시 자신들을 勤王義兵으로 인식하였다. 44) 요컨대, 이들은 性理學的 道를 지키려면 勤王義兵을 일으켜 外勢를 討伐하고 역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다시 말해 호남지방의 전기의병은 勤王을 목표로 反開化·反侵略 鬪爭을 전개한 것이다. 이는,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보수적·복고적인 성격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勤王을 志向한 전기의병의 사상적 기반은 衛正斥邪思想에서 찾아진다. 다만, 이들은 명성왕후시해사건과 斷髮令, 그리고 의복제도의 개정, 아관파천 등과 같은 정치 사회적 격변을 거치면서 外勢의 침략에 적극 대응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2. 保國志向의 중기의병 일제의 국권침탈이 갈수록 심화되자 의병투쟁이 再燃되었다. 특히, 일제가 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시켜 외교권을 강탈해가자,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호남지방에서도 전기의병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다시 倡義를 모색하였다. 예 컨 대, 奇 參 衍 과 奇 宇 萬·高 光 洵 등 이 그 들 이 다. 전 기 의 병 의 해 산 에 강 력 히 반 발 했 던 42) 「丙申疏 二」, 『송사선생문집』 1, 287쪽 참조. 43) 「三告列邑文」, 앞의 책, 466쪽 참조. 44) 「丙申疏」, 『鹿川遺稿』 卷 上(197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