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page

14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처럼 그는 동학농민전쟁의 치유방안을 성리학의 범주에서 찾았다. 당시 그는 제자들에게 斥邪보다는 扶正, 다시 말해 성리적 道를 수호하기 위해 鄕會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36) 이는, 人心의 結集을 강조한 노사의 內修論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왕후시해사건과 斷髮令 등이 잇달아 발생함으로써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하는 재야의 유생들은 매우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질서가 붕괴되는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만을 비롯한 호남지방의 유생들은 즉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이들에게 의병을 일으키라는 국왕의 詔勅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弑害된 國母의 復讐와 단발령의 부당성을 강력히 규탄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는데 머물러 있었다. 이 무렵 嶺南의 禮安과 安東에서 보낸 통문이 長城에 도착하였다. 37) 통문의 내용은 단발령의 부당함과 變服令의 성토, 國母의 원수를 반드시 갚자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毅菴 柳麟錫(1842∼1915)의 ‘檄告八道列邑’이 전해졌다. 38) 유인석의 격문에는 高宗의 命을 받아 의병을 일으킨다는 점과 그의 스승인 華西 李恒老의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겠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특히, 유인석은 尊華攘夷論을 주장하였는데, 39) 성리학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의 침략을 적극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유인석은, 자신은 북쪽에서 擧義하겠으니, 기우만은 남쪽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성리학적 道를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이 러 한 분 위 기 에 고 무 된 기 우 만 은 호 남 의 儒 林 들 과 倡 義 를 모 색 하 였 다. 당 시 장 성 은 전라남도에서는 유생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40) 이 지역은 또한 蘆沙學派의 본고장이기도 하였으며, 노사의 손자인 기우만의 학문적 영향이 크게 좌우하였음은 물론이다. 41) 그리하여 장성의 의병봉기는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노사학파의 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즉, 奇宇萬·鄭義林·奇參 衍·金翼中·李承鶴·奇宰·朴源永·奇東準·吳駿善 등이 그들이다. 1895년 음력 12월, 기우만은 의병을 일으키면서 상소하였는데, 아래의 인용문이 그 일부이다. 무릇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사오니 머리를 깎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망하 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 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중략) 開化같은 따위에 이르러서는 천하 각국이 그로써 패망한 것이 소상히 드러나서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것이옵니다. (중략) 단발령을 환수하시고 옛 제도를 회복하시어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대의를 八道에 포고하시오면 통분 망극한 우리 백성이 누구나 전하를 위 36) 「與諸同志」, 『松沙先生文集』 2(경인문화사, 1990), 348쪽 참조. 37) 변상철 변만기, 앞의 책, 273쪽. 38) 「松沙集」, 『자료집』 3, 27쪽 및 「與奇宇萬」, 『毅菴集』 권 7(景仁文化社, 1973), 152쪽 참조. 39) 朴敏泳, 「毅菴 柳麟錫의 衛正斥邪運動」, 『淸溪史學』 3(1986) ; 『義兵戰爭硏究』 上(지식산업사, 1990), 308-317쪽 참조. 40) 『全南暴徒史』(이하 『폭도사』)(전라남도 경무과, 1913) ; (李一龍 譯, 『秘錄 韓末全南義兵戰鬪史』(全南日報印書館, 1977), 20쪽. 41) 長城義兵에 참여했던 昌平出身의 유생 高光洵은 기우만을 ‘士林之領袖’로 평하였다(高光洵, 『鹿川遺稿』 권 1, 4a쪽 참 조). 이러한 사실로 보아 송사의 영향력은 장성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