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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43 데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26) 따라서 호남지방의 전기의병 봉기를 주도한 기우만을 중심으로 거의목표를 찾아볼까 한다. 더욱이 그는 전기의병에 관한 비교적 많은 자료를 남겼으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전기의병의 사상적 기반은 이미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衛正斥邪思想에서 찾아지는데, 이는 호남지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중반 서양세력이 침공하자 奇正鎭을 중심으로 위정척사운동이 크게 일어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선 후기의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배태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春秋의 義理思想에 바탕을 둔 衛正斥邪運動과 왕권의 옹호에 적극적이었다. 27) 특히, 그는 ‘內修’를 강조하였으나, 28) ‘外攘’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즉, 그가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歐美列强의 침략을 저지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9) 이와 같은 기정진의 사상은 그의 門人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특히 그의 제자이자 親孫子이기도 한 奇宇萬에 의해 그대로 전수되었다. 30) 기우만은 노사의 理一分殊說을 義理論에 입각하여 실천하였던 것이다. 31) 그는 스승의 뒤를 이어 노사학파를 이끄는 領袖로서 “奇山林”으로 불리워진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유생이었다. 32) 따라서 그가 전기의병의 핵심인물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33) 그런데 호남지방의 양반과 유생들은 당시 東學農民戰爭의 후유증을 수습하는데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東學農民軍의 색출과 五家作統制의 정비 등과 아울러 鄕會의 조직을 강화함으로써 성리학적 사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34) 기우만 역시 자신의 향리인 長城에서 鄕飮酒禮를 거행하는 한편,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공을 세운 羅州牧使 閔種烈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의 碑文을 지어 주었다. 35) 集』 21(1981). , 「松沙 奇宇萬의 斥邪衛正 思想」, 위의 책 22(1982). 李相寔, 「韓末의 民族運動長城地方의 義兵活動을 중 심으로」, 『人文科學』 2(木浦大, 1985). 26) 1896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쳐 나주에 보내진 松沙의 通文이 계기가 되어 나주에서도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본 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李炳壽, 「錦城正義錄」 丙編, 『자료집』 3(1971), 63~70쪽 참조). 羅州義兵에 관해서는 拙稿, 「1896년 羅州義兵의 結成과 活動」,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下(일조각, 1994). 27) 오종일 외, 앞의 논문, 18쪽. 한편, 기정진의 사상은 성리학적 道의 고수를 위해 異端에 대해서는 대결적인 입장을 보인다 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에서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려는 발상이 나올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姜在彦, 『韓國의 近代思想』<한길사, 1985>, 40-41쪽). 28) 「丙申疏」, 『奇正鎭全集』 1(아세아문화사, 1982). 269-284쪽과 琴章泰·高光稙 共著, 『儒學近百年』(博英社, 1984), 302 쪽 그리고 이해준·손형부 외, 『전남지방사서설』(김향문화재단, 1990), 146쪽 참조. 29) 그는 서양세력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擧義檄文을 짓고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召募使가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서 중지하였다(『奇正鎭全集』 四, 184-188쪽). 30) 현상윤, 앞의 책, 428쪽. 31) 오종일 외, 앞의 논문, 30쪽. 32) 「通告列邑文」, 『鹿川遺稿』 卷 上 및 「松沙集」, 『자료집』 3, 50쪽 참조. 33) 黃玹은, 당시 호남인들이 기우만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권유하였다고 적고 있다(『梅泉野錄』, 198쪽). 34) 邊相轍·邊萬基, 『鳳棲·鳳南日記』(국사편찬위원회, 1979), 221·224·228-229쪽 참조. 35) 「松沙集」, 『자료집』 3, 1971, 22-23쪽 참조. 또한 기우만은 동학농민군과 싸우다 죽은 長興府使 朴憲陽을 추모하는 碑文 을 짓기도 하였다. 그의 反東學的인 입장을 개진한 글은 『松沙先生文集』 권 25에 실려 있다(「羅州平賊碑」와 「長興府使朴 公祭壇碑」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