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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39 성토하며 퇴위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경찰들이 해산을 지시하였으나, 분함을 참지 못한 시민들은 돌과 기왓장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이들을 종로 방면으로 몰아세웠다. 그런데 종로에도 수 천명의 인파가 집결하여 고종의 퇴위를 반대하는 연설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마침 대한문에서 밀려온 시민들과 합류한 이들은 대규모의 시위대로 변모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더욱이 시위보병 3대대에 소속된 한국군 약 100명이 이들과 합세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일제 경찰과 맞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인 경찰과 우편집배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고종을 일본에 억류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서울과 개성, 평양 그리고 각 항구의 상인들도 항의의 표시로 가게문을 닫았다. 나이어린 학생들은 시위대열에 가담하였다. 또한 시위대 제2연대의 參將 李熙斗, 參領 李甲·林載德 등은 양위식 거행시 매국각료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모두 체포되어 유배형을 당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同友會 국민교육회 기독교청년회 등 계몽운동 단체들도 퇴위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우회는 회장 尹履炳을 중심으로 시민들과 합세하여 날마다 투석전을 벌였다. 이들은 石鼓壇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李秉武의 집을 습격하거나 소각하였다. 다른 결사대원들은 광화문에서 매국7적을 저격할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의 출동으로 실패하였다.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진회를 성토하는 한편, 만약 황제가 일본으로 끌려간다면 기차 철로 위에 엎드려 생명을 던지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일부 시민들은 일진회 기관지 國民新報社를 습격하여 사옥과 기계를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처럼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에 수많은 국민들이 격렬한 반일투쟁을 벌였다. 심지어 하찮은 동물들도 반일활동에 동참한 것으로 전한다. 즉, 黃玹의 『梅泉野錄』에는 서울의 진고개에서 미친 개가 일본인 7명을 물어 죽였으며, 태평동에서도 삽살개가 일본 아이를 물어 죽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결국 이등 통감은 고종의 일본억류계획을 포기하였다. 이름없는 시민들과 군인들이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고종퇴위반대운동을 전개한 결과라 하겠다. 이에 반해 국가의 각별한 은혜를 입은 이완용 등 친일관료들은 민족의 장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一身의 영달을 추구하고자 일제와 야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후기의병의 깃발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2) 정미7조약의 체결과 군대해산 1907년 7월은 우리 민족에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이 달에 헤이그특사사건이 있었고, 19일에는 그것을 빌미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고위관리를 대거 요직에 앉혔다. 이어서 7월 31일에는 고작 1만명도 되지 않은 군대마저 강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