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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37 이준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상설과 합류한 후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이위종을 만나 헤이그로 향하였다. 갖은 고생 끝에 이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이었다. 이들은 평화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나 허사였다.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나라인데다 일제의 방해 공작이 매우 치열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화회의 의장이며 러시아의 수석위원인 넬리도프를 비롯하여 미국 영국 이태리 프랑스 독일 등 당시 구미열강의 위원들에게도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만나주지 않았다. 어느 나라도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동정을 보이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희망인 개최국 네덜란드의 외무대신에게도 회의 참석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이들은 우리의 억울함을 언론에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각국 기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서 수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여 일제의 만행과 한국에 대한 불법적인 침략 상황을 폭로하였다. 영어와 불어에 능한 이위종이 당시 조선이 직면한 정치적 상황을 세계 각국의 기자들에게 잘 설명함으로써 각국의 언론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또한 국제주의협회의 초청을 받아‘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주제로 연설하여 일제의 침략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이들이 비록 본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각국 언론에 우리의 억울한 사정이 연일 보도됨으로써 국제여론의 환기에 크게 기여하였다. 12) 일제의 침략상황을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려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한편, 이러한 소식은 즉각 일본 정부와 통감부에 전달되었다.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들의 활동이 언론을 통하여 국내외에 크게 보도되자 일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연일 내각회의를 열어 수습책의 강구에 골몰하였다. 통감인 이등은 친일내각의 총리대신 李完用을 불러 크게 힐책하는 한편, 이번 사건의 책임을 고종이 져야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등의 의도를 간파한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삼아 고종의 강제퇴위를 추진한 것이다. 한편, 헤이그특사사건은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로 국내에도 알려졌다. 더욱이 특사들의 활동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어 보도되었다. 특히 이준의 죽음에 관해서는 와전된 내용이 많았다. 즉, 이준 등이 본회의에 참석할 수 없자,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연단으로 나아가 “우리는 조선 황제의 밀사로서 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평화회의는 강자들의 회의체에 불과하다. 일제의 침략을 이렇게 해도 믿지 못하겠느냐”며 칼로 배를 가르고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준은 할복자결이 아니라 ‘憤死’로 전해진다. 일본대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자, 그는 분노와 좌절로 인해 울분을 참지 못하다 죽었다는 것이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운명을 달리한 12)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421-4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