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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35 인정되는 지도·감리·보호의 조치를 한국에서 행할 권리를 승인”한다는 내용으로 8월 12일 조인된 것이다. 10) 일제는 한국 ‘보호국화’ 문제에 대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낸 뒤 10월 27일 각료회의에서 구체적 실행방침을 수립하고 ‘을사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 제반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伊藤博文은 11월 15일 고종을 알현하여 좌우를 모두 물리치게 한 뒤 사전에 준비한 조약의 원안을 제시하며 승인을 강박하였다. 16일에는 일본공사 임권조가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조약을 강요하였으며, 이등은 조약에 찬성하도록 원로대신 심상훈과 여러 대신들을 협박하였다. 17일에는 덕수궁 潄玉軒에서 조약 가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때 長谷川好道가 거느리는 일본군이 완전무장을 한 채 궁궐 안팎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며, 본회의장인 궁내에도 착검한 헌병 경찰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오후 3시에 시작되어 밤 8시까지 계속된 이 회의에서는 조약에 찬성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에 林權助는 이등박문과 장곡천호도를 다시 불러들여 대신들을 강제로 재소집하여 회의를 재개토록 하여 이튿날 오전 12시 30분까지 대신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마침내 을사5적의 찬성을 받아낸 이등박문과 임권조는 고종의 윤허도 받지 않고 스스로 외부인(外部印)을 탈취하여 조약문에 멋대로 조인하였다. 그러므로 을사조약은 일제가 폭압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찬성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통치권자인 광무황제의 승인과 서명, 그리고 국쇄의 날인을 받지 않은 명백한 불법조약이었던 것이다. 을사조약 늑결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불가를 주장하였고, 나머지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적’은 책임을 고종에게 미루면서도 찬의를 표하였다. 을사조약의 늑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이른바 ‘보호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한국민은 격분하였으며, 중기의병으로 떨쳐 일어나 거족적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의 민심이 을사조약 늑결을 계기로 격분하여 항일 적개심으로 끓어오르고, 더욱이 국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여 항일전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뒤바보’라는 필명의 桂奉瑀는 『獨立新聞』에 발표한 「義兵傳」에서는 을사조약 늑결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하거나 의병을 일으켜 결사항전하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5조약이 되었다는 소식이 일시에 播聞되매 비분강개 哭泣熱狂 온갖 모양의 대대적 반항운동이 起하 였다. 그러자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世臣은 차제로 자살 순국하였다. 그렇게 생명을 희생할 터이 면 차라리 包羞忍恥하고 와신상담의 참담 경영을 하다가 설령 아기날도 장군의 말로가 된다든지 그 렇지 않으면 敵人의 劍下魂이 되더라도 그네 自心에도 여한이 無하고 隨하여 우리 후인된 자도 滿衿 10) 윤병석, 「을사5조약의 신고찰」, 『국사관논총』 23(국사편찬위원회, 1991),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