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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보수적이고 복고적이라 하더라도 당시의 단발령 강행은 조선인 모두에게 매우 충격적이었음은 위의 인용문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의병봉기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시켰다. 다시 말해 궁궐의 강점이나 國母弑害 등과 같은 독립국으로서의 자주권 침해보다도 오히려 이른바 성리학적 衛道論이 더욱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전기의병은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성리학적 도를 수호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7) 따라서 전기의병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해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것에 항거하려는 보수유생의 최후수단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전기의병의 봉기배경으로 좀더 다양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태양력의 채택(1895.10.26)이나 수 차에 걸친 의복제도의 변경, 아관파천(1896. 2. 11)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전기의병을 개혁노선을 둘러싼 정권투쟁적 성격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나, 이들의 대내적 지향을 강조하는 연구경향도 있다. 8) 이를 통하여 전기의병의 봉기원인이 다양화될 수도 있으나 의병운동의 범주가 애매해질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2. 중기의병의 거의배경 전기의병이 해산한 지 10년 뒤에 중기의병이 재기하였다. 중기의병이 재기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1904년 일제가 도발한 러일전쟁이었다. 그리고 중기의병 재기의 계기가 된 것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그 여세를 몰아 실질적 국망(國亡)을 의미하는 을사조약을 늑결한 데 있었다. 즉 전기의병과 청일전쟁 양자가 갖고 있는 관련성과 마찬가지로, 중기의병과 러일전쟁은 긴밀한 상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9) 곧 중기의병은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일어났고, 을사조약 늑결이 그 직접적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일제의 외교공작은 포츠머드 강화회의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05년 7월 미국의 승인을 얻은 데 이어,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로 영국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일본과 미국의 밀약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 H. Taft)와 일본수상 桂太郞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협정으로, 7월 31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추인한 것이다. 협정의 내용은,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하등의 침략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할 것, 동아시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영국·일본 3국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보할 것,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이를 지배할 것 등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보를 위한 조약체결이나 나아가 그 이상의 주권침탈 행동도 취할 수 있다는 보장을 미국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영일동맹은 그동안 영·일 양국간의 이견조정을 거쳐 3·4차례의 수정안을 낸 끝에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기 때문에 영국은 일본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정당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7) 홍영기, 「舊韓末 湖南義兵의 倡義性格」, 『湖南文化硏究』 22(1993), 51쪽 및 오영섭, 앞의 책, 245쪽. 8) 李相燦, 『1896년 義兵運動의 政治的 性格』(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6), 5-7쪽. 9) 박민영, 『한말 중기의병』(독립기념관, 2007),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