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page

12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초반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용되는 공통적 특징을 보여주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도도한 물결은 전라 우도에서 좌도로, 북에서 남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전남 서부 지역 농민군은 도서지역으로의 확산에 기여하였고, 중부 지역 농민군은 나주 공방전을 주도하였으며, 북부 지역 농민군은 남원대도소의 군수물자 지원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남부 지역 농민군은 전라도의 여러 농민군 조직과 연합하여 최후 격전을 주도하였다. 동부 지역 농민군은 서부 경남 진출을 통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퇴로의 확보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평등한 세상과 농민 중심의 자치를 실현하려고 도모했지만, 일본군의 정예 무기에 가로막혀 좌절됨으로써 엄청난 희생을 남겼다. 이와 같이 농민군이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화력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군과 관군이 보유한 무기는 대부분 정예의 신식무기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대부분 죽창이나 몽둥이, 칼과 창, 아니면 재래식 무기인 鳥銃이 고작이었다. 설령, 신식무기를 노획하였다 하더라도 실탄의 부족과 사용 미숙으로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황현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개 우리나라 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일본총의 사정거리는 4∼500보도 더 되 었으며, 불이 총대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따라서 눈이나 비가 내린 다고 하여도 계속 쏠 수 있었다. 적과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도 쏘지 못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대 패하였다.(『번역 오하기문』, 269쪽) 황현은 농민군의 주무기인 화승총과 일본군의 신무기를 비교하고서 그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농민군은 지리적 잇점을 살려 공격하거나 야간기습이나 숫자상의 우위로써 일본군과 관군에 대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농민군이 어느 전투에서나 산봉우리를 점령하고 함성을 질러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22) 이는 곧 농민군이 유리한 지형과 우세한 병력을 이용한 점을 알려준다. 전라도의 농민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공세에서 수세로 몰리게 되었다. 당시의 농민군들이 어쩔 줄 몰라 하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때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뒤쫓아 체포할 수 없었다. 각 읍에서는 시골 마을에 명령하여 거리의 십 리나 오리마다 초소를 만들어놓고 표식을 살펴 함부로 지방을 넘나드는 것을 방지하고 무릇 처음보 는 의심스러운 사람은 세밀하게 캐물어 체포하도록 하였다. 날씨 또한 몹시 추워 적은 멀리 달아나 지 못하였고 산골짜기나 동굴 속에 숨을 수도 없었으므로 얼어죽고 목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 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308쪽) 422)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