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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25 장흥과 강진의 농민군은 집강소 이후에도 동학교단 조직을 기반삼아 폐정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던 중에 2차 봉기의 동원령에 호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이 부임한 장흥부사 박헌양을 비롯한 양반세력과 대립이 고조되었다. 결국 장흥 농민군 지도부는 기존의 체제를 수호하려던 수성군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장흥읍성을 점령하였다. 곧바로 이들은 일본군 및 관군과 더불어 최후의 회전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의 마지막 승부처를 석대들녘으로 삼았다. 석대들 전투는 장흥의 농민군뿐만 아니라 전북의 금구접, 강진 광주 능주 등의 농민군 총 3만명이 연합하여 최후항쟁을 펼쳤다. 하지만 석대들 전투에서 최소한 1천명 이상의 농민군 희생자가 발생함으로써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이 전적지에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현재 조성 중에 있다. 한편, 해남 우수영 건너 진도에도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진도에서도 농민군 수백명이 희생되었는데, 효수된 농민군의 유골은 목포에 거주하던 목화농장 감독관인 일본인이 ‘채집’하여 1906년에 北海島大學으로 보내졌다. 1995년 7월, 이 대학 古河講堂의 종이상자에 보관되어 있던 유골 6점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한 유골에서 ‘동학수괴’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골은 원광대 박맹수 교수 등의 주도로 국내로 봉환되었다. 하지만 더욱 부끄러운 사실은 110년 만에 돌아와 화제가 되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아직도 2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안장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야 전주시가 유골을 화장한 후 완산전투지 역사공원에 안장하기로 했으나, 일부에서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유골을 영구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끝으로 전남 동부지역 농민군의 활동상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순천에서 활동한 영호도회소는 전남 동부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조직이었다. 전남 동부지역은 군현별 농민군 활동보다는 영호도회소 중심으로 활동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러한 활동은 남원대도소의 김개남의 의도와 전략과 연관된 것으로 보여진다. 영호도회소는 폐정개혁을 추진하다가 2차 봉기의 동원령에 호응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경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의 西進을 저지하고 나아가 일본세력을 한반도로부터 쫓아내는 것이었다. 이는, 임진왜란시 전라도 의병들이 진주까지 달려가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것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경남 서부 진출이 저지되자 이들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좌절되고 말았다. 경남 진출과 퇴로 확보 활동을 특징으로 한 영호도회소는 이리저리 헤매다 광양에서 해산하였다. 일본군은 방황하는 영호도회소 농민군을 매우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그들은 정예의 육군과 해군, 그리고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무차별적으로 체포, 처형하였다. 그 결과 순천을 비롯한 광양 여수 고흥에서는 약 2천명 이상의 농민군이 희생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요컨대, 광주-전남의 동학농민혁명은 지역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동학의 수용은 18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