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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남원대도소의 김개남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다. 곡성 역시 남원대도소의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자체 농민군 세력이 약하여 인근 지역의 침탈과 군수물자 조달에 시달리는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구례의 농민군 활동은 전 현직 현감의 도움을 받아 매우 순조롭게 전개되었다. 전현직 현감이 동학에 입도하여 농민군을 적극 도왔던 것이다. 그런데 구례 역시 남원대도소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남원의 농민군과 함께 운봉전투에 참여했으며,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구례에서 거주한 황현과 유제양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는 점이다. 황현의 『梧下記聞』과 「甲午平匪策」, 유제양의 「甲擾傳」이 그것이다. 이들은, 농민들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폭정에 시달린 점은 인정하면서도 정부에 저항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킨 것은 잘못된 처사로 이해하였다. 전남 남부-연해 지역은 최후항쟁지라는 특징이 있다. 일본군이 농민군을 서남해안으로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형성하여 압박했기 때문에 장흥과 해남이 최후항쟁지가 되었다. 일본군은 부산과 서울에서 전라도를 향해 전진하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결국 전라남도의 서남해에 위치한 장흥과 해남, 여수 등지는 자연히 농민군의 최후 승부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전남 동부지역에 웅거하던 영호도회소는 여수에 위치한 좌수영을 놓고 혈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여기에서 밀린 농민군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장흥에서 최후항전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바로 장흥 석대들전투이다. 이에 앞서 강진의 서쪽에 자리한 영암의 농민군은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영암은 양반 중심의 강력한 향촌조직이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암 군서면 구림의 會社亭, 덕진면 영보리의 永保亭, 영암읍 장암리의 場岩亭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이러한 향촌질서가 동학의 수용과 농민군 활동을 전개하는데 제약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더욱이 바로 인근에는 나주목이 농민군의 공세를 끝까지 막아내며 버틴 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암 농민군의 활동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장흥의 동쪽에 인접한 보성의 농민군 활동은 매우 강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현은, “전라좌도에서는 남원과 보성 지방 적이 가장 흉악하였다. 그런 까닭에 민간에서는 ‘전라좌도의 위쪽은 남원접장이 싹 쓸었고, 전라좌도의 아래쪽은 보성접장이 싹 쓸었다.’ 421) 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흥양, 지금의 고흥과 장흥을 포함한 남부-연해 지역 농민군의 강력함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보성지역 활동을 주도한 인물은 1, 2차 봉기에 모두 참여한 문장형과 박태길이었을 것이다. 특히, 박태길은 유원규 보성군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이들은 웅치를 비롯한 장흥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421) 황현, 『번역 오하기문』,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