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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주둔 419) 했는데, 일반적으로 장흥의 연합 농민군은 3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숫자는 과장되어 알려졌겠지만, 수세에 몰린 전라도의 모든 농민군이 장흥과 해남 등지의 해안가로 밀려든 것은 사실이다. 이로써 짐작컨대, 고흥 농민군의 경우 수성군이 워낙 강력하게 대응하자, 장흥 방면으로 이동한 것 같다. 따라서 고흥 농민군의 상당수는 현지에서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장흥이나 해남에서 치러진 최후의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상과 같이 영호도회소는 전라좌도의 남부지역, 그러니까 현재의 전남 동부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조직이었다. 순천에 본영을 두고서 인근 지역인 광양현과 낙안군 그리고 좌수영과 고흥 등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서부 경남지역에서의 활동도 크게 돋보였다. 순천을 중심으로 한 전남 동부지역에서 강력한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농민들이 조선 정부의 압제에 시달려오며 스스로 각성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지역 농민들은 일찍부터 조선사회의 압박과 굴레를 떨쳐버리려고 노력하였다. 즉, 1862년 농민항쟁 당시에도 순천 농민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친 바 있었다. 동학이 만들어진 후에는 입도자가 증가하여 보은취회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이들의 민족의식과 평등사상이 크게 고양되었을 것이다. 1894년에 관리들의 탐학이 갈수록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척왜와 除暴救民 및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집강소가 설치된 6월 이후 영호도회소는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탐학한 관리와 토착세력을 응징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침략이 자행되자, 8월말부터 본격적인 항일구국투쟁에 나서서 민족의 수호자를 자처하였다. 2차 봉기이후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가장 먼저 起包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경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의 西進을 저지하고 나아가 일본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내쫓려는 것이었다. 이는, 임진왜란시 전라도 의병들이 진주까지 달려가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것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맞서 일본군은 강력하고도 단호하게 대응하였다. 그들은 정예의 육군과 해군, 그리고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영호도회소의 혈로를 막았으며,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써 순천을 비롯한 광양과 여수, 그리고 고흥에서는 약 2천명의 농민군이 희생되었다. 결국, 영호도회소의 지도부와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막강한 화력과 수성군의 잔혹한 진압작전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붕괴되었다. 그러나 영호도회소가 지향한 민족의식과 평등사상 및 부정과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은 길이 남을 것이다. 419) 「宣諭榜文並 東徒上書所志謄書」, 『동학란기록』 하, 3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