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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위에서 보이듯이, 음력 12월 7일(양 1895.1.2), 광양읍성에 주둔하고 있던 김인배이하 1천여 명의 농민군이 수성군의 공격을 받아 김인배이하 200여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가 모두 붕괴된 것이다. 바로 그날 김인배는 베임을 당하여 그 머리가 객사에 걸렸으며, 봉강면 접주 박흥서 등 23명도 포살되었다. 404) 수접주 유하덕 이하 200여 명은 그 다음날부터 차례로 효수되거나 총살당하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김인배 이하 약 150명 정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체포된 경우에도 대부분 가차없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음력 12월 22일에는 광양의 농민군 朴鶴一 등 49명이 체포되었다. 405) 약 1천여 명의 농민군 가운데 그 1/10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니 그 피해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이들 명단에는 광양 출신은 물론이고 순천과 경상도의 곤양과 삼가 지역 출신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명단에는 보이지 않지만 김인배의 9촌 숙부인 顯翼(1867∼1895)도 광양에서 죽었다고 한다. 406) 따라서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광양에서 죽어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영호대접주 김인배는 체포되기에 앞서 함께 활동하던 조씨 성의 처남에게 “장부가 사지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고 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407) 한편, 광양읍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月浦와 多鴨 玉谷 등지에는 수천 명의 농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백명의 일본군과 한국군 그리고 1,600여 명의 민포들에게 협공당하고 있었다. 408) 여기에다 좌수영 군대까지 합류하였다. 1895년 1월 2일, 中哨營將 곽경환은 虞侯 申椀과 함께 좌수영군 100여 명을 이끌고 남해도를 거쳐 하동의 內橋場에 이르러 일본군과 연합하였다. 1월 5일, 농민군은 이들과 월포에서 교전하였으며, 6일에도 광양현 白楊洞에서 동학군 지도자 丁弘西는 곽경환이 이끈 100여 명에게 포박, 효수당하였다. 그런데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하동의 민포들로부터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즉, 하동의 민포들은 음력 12월 10일(양 1.5) 塔村에서 섬진강을 건너와 백운산 자락의 옥룡면에서 농민군 31명을 체포하였으나 京軍에게 인계하였다. 또 다른 수성군은 광양의 竹川에 도착하여 농민군의 木寨를 소각해버렸다. 옥곡에서 체포된 농민군 48명은 飛村에서 총살되었으며, 체포된 13명 중 6명은 영호도회소 농민군의 지도자였다. 朴正周 柳允擧 朴士永 全伯賢 金光俊 高光信 등이 그들이다. 광양현에 소속된 섬계역에서는 더욱 많은 농민군의 피해를 입었다. 섬계역에서 희생된 섬계역 40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쪽. 405)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동학란기록』 하, 710쪽. 406) 『김해김씨경파통합보』 병일편, 881쪽. 407) 이이화, 앞의 책, 104쪽. 408) 이하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권의 6 14∼15쪽을 주로 참고하여 정리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