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page

동학혁명 113 구원을 요청하였다. 다음날 축파호 함장 黑岡帶刀는 陸戰隊 1백여 명을 상륙시켜 좌수영 군대와 합류하여 곧바로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일본 육전대와 좌수영 哨官 郭景煥은 덕양역으로 돌아가는 농민군을 역습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으나, 불을 지르며 대항하는 농민군에게 그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394) 그리하여 일본군은 육전대를 2백명으로 증원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金鰲島와 喇叭島의 일본 어민까지 강제로 끌어와 좌수영 공방전에 가담시켰다. 종고산과 서문에 주둔한 농민군도 목숨을 걸고 좌수영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전력을 보강한 일본군과 좌수영군 그리고 성 안의 주민들은 결사 항전을 벌여 농민군을 막았다. 특히, 좌수영군은 일본군복으로 변장시킨 군대를 투입하여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군을 두려워하는 농민군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또한 일본군과 좌수영군은 군사를 매복시켜 농민군을 기습하였다. 그 결과, 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순천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농민군은 1895년 1월까지 여러 차례 좌수영군과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다시 잡지 못하였다. 이상과 같이 영호도회소는 대접주 김인배가 직접 나서서 3∼4회에 걸쳐 좌수영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는 영호도회소의 최종목표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즉, 좌수영을 근거지삼아 지구전을 펼치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남해의 섬으로 들어가 장기항전을 모색하려는 농민군의 마지막 기대가 무너졌던 것이다. 3) 영호도회소의 붕괴와 피해 현황 11월 중순을 고비로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인 농민군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집강소 활동기부터 농민군에 협조해온 하급관리와 주민들의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졌다. 특히, 영호도회소의 경남 진출이 좌절되고 마지막 거점이자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되던 좌수영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급속하게 이탈하였다. 또한 강제로 가담한 일반 농민군들 가운데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과 관군의 포위전략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으로, 농민군을 강진·해남지역으로 몰아붙여 완전히 괴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영호도회소의 농민군 역시 그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호도회소는 좌수영 공격에 실패한 직후인 12월 하순부터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농민군에게 상황이 크게 불리해지자 배반자들이 생겨났다. 먼저 영호도회소의 본거지인 순천부터 알아보자. 영호도회소의 본영인 순천읍성에 주둔한 농민군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참고된다. ① 작년(1894-저자주) 6월 이후 금구적 김인배당이 각처의 비도를 통솔하여 10만명을 무리로 삼아 서 (순천의) 성중에 웅거하면서 곧이어 영호도회소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군기와 남의 전재를 빼앗 394) 구양근, 앞의 책, 469∼4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