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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끌어와 좌수영밖에 주둔시켜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따라서 좌수영은 영호도회소의 영향에서 다소 비켜나 있었다. 그러던 음력 9월경 여천 쌍봉출신의 尹京三이 영호도회소의 농민군과 더불어 남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자리에서 붙잡힌 농민군 3∼4명은 바다에 내던져졌다. 382) 이후 영호도회소는 좌수영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가 경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한 상황에서 견고한 요새지에 해당하는 좌수영을 섣불리 잘못 공격하였다가 농민군의 희생이 많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경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한 농민군의 보급과 군수물자를 책임진 후방군의 역할을 충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수사 김철규는 농민군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는 중이었다. 아래의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방금 전라좌수사 김철규의 장계를 보니 비적들이 사납게 날치므로 쳐없애려고 하지만 수영에 저축한 곡식이 없어 군량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부근 고을에 있는 어떤 쌀 중에서 1천섬만 떼달라고 하였습니 다. 해당 수영은 호남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방어를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광양의 그 전 둔전 곡식중에서 적당히 가져다 씀으로써 군량을 보충한 후에 보고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어떻습 니까」 승인하였다.(『고종실록』 권 32, 고종 31년 10월 28일자) 좌수사 김철규는 음력 10월말 좌수영을 지키기 위해 군량을 요청하였고, 정부에서는 그가 요구한대로 들어주고 있다. 정부는 농민군에 적대적인 김철규를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좌수영은 군대와 무기를 보강하고 군수품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호도회소는 동으로는 하동에서 밀렸으며, 남에서는 좌수영이 버티고 있었다. 순천에서 전열을 정비하던 김인배는, 전봉준과 김개남의 농민군이 각각 우금재와 청주에서 패하였다는 우울한 소식을 들었다. 시시각각 불리해진 전황에 따라 영호도회소 역시 일본군과 관군에 대응태세를 갖추어야 하였다. 이미 선봉장 李圭泰가 이끄는 주력부대 약 800명을 비롯한 巡撫營 壯衛營 統衛營 등 3천여 명의 관군이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향해 남진하고 있었다. 383) 또한 주한일본공사에 새로이 임명된 井上馨은 농민군의 무력 진압을 서둘렀다. 그는 일본군을 3개 부대로 나누어 전라도로 출동시켰다. 즉, 1개 부대는 충청도 서해안지대를 우회하여 전라도 서남해안을 거쳐 여수로 향하게 하였으며, 다른 1개 부대는 서울에서 충청도 중앙부를 지나 전라도 남단에 이르게 하고, 나머지 1개 부대는 서울에서 강원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남하하도록 하였다. 각 부대마다 조선의 관군을 앞세웠음은 물론이다. 384) 따라서 일본군 3개 부대의 최종 382) 김계유 편, 『麗水麗川鄕土誌』(반도, 1982), 264쪽. 383) 구양근, 『갑오농민전쟁원인론』(아세아문화사, 1993), 449∼450쪽. 384) 위의 책, 309∼3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