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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07 물론 영호도회소는 경남 서부지역을 다시 점령하고자 하였다. 즉, 경남 三嘉에서 패배한 김인배는 순천에 돌아와 농민군을 규합하였다. 373) 김인배는 지난 음력 9월 초 하동을 점령한 방법으로 다시금 하동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드디어 11월 20일 수천 명의 농민군이 하동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한 부대는 섬계역에 진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섬진강을 향해 나아갔다. 이에 토포사 지석영은 일본군과 함께 김인배의 의도를 간파한 뒤 군사를 매복시켜 농민군의 후방을 차단, 포위하고서 급습하였다.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자신(지석영 ; 필자주)은 본대를 지휘하여 망덕 바깥바다를 건너 귀로를 차단하고 일본군 수십명에 게 부의 공관을 향해 바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적 중에 기를 가지고 있던 자가 먼저 꺼꾸러졌다. 적이 그것을 보고 황급히 달아났지만 총에 맞고 강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중략) 이 때 마침 날이 저물고 큰 비가 내렸다. 적은 무기를 버리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인 배는 산 속에서 움푹 파인 곳에 엎드려 소나무 가지를 잘라 얼굴을 가리고 人定까지 기다렸다가 비를 맞으며 맨 발로 달아났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69∼270쪽) 이처럼 전술의 부재와 무기의 열세로 말미암아 김인배의 영호도회소는 도리어 크게 패하고 말았다. 당시 섬진강을 건너다 빠져 죽은 농민군이 무려 3천여 명이었다고 전한다. 결국, 김인배는 농민군을 수습하여 수접주 유하덕과 같이 순천으로 돌아와 군기를 정비하였다. 374) 이후의 전투는 주로 광양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예컨대, 11월 16일에는 광양 龜嶝山 위에 있던 농민군이 일본군 148명의 습격을 받아 그중 7∼8명이 전사하였다. 20일 광양의 섬계역 전투에서도 농민군 7∼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게 된 것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경남 서부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거점을 확보한 뒤 부산까지 진격하여 일본세력을 구축할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들은 9월말부터 영남으로의 진출을 적극 시도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공세에 가로막혀 그 한달 후에는 수세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2-2) 낙안읍성 공격과 군수물자 확보 김인배가 이끄는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가 음력 9월 1일(양 9.29) 경남지역으로 진출한 상황에서도 영호도회소의 본부인 순천에는 상당한 규모의 농민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력부대의 후방을 방어함과 동시에 치안의 유지와 폐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세력이었다. 또한 농민군의 보급로와 군수품의 확보라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수만 명의 농민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373) 황현, 『번역 오하기문』, 269쪽. 374) 위의 책, 2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