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page

동학혁명 103 서로의 전투를 중지하고 일본을 몰아내자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351) 전봉준의 농민군은 12월 초순 우금재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후 일본군에게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한편, 김개남의 영향하에 있던 순천의 영호도회소는 음력 8월말부터 새로운 활동에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동학의 포교, 치안의 유지 및 폐정개혁 등과는 달리 본격적인 무력투쟁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영호도회소는 먼저 경남 서부지역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이미 지난 7월에 하동의 동학교인을 도와 도소를 설치하여 활동하다가 허망하게 물러난 일이 있었던 데다 그곳에서 쫓겨난 동학농민군들도 광양에서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352) 또한 이들은 경남 서부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전라도 지역에 대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차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농민군의 경남 서부지역의 점령은 상황에 따라서는 경남 전체 지역에 대한 농민군의 군사활동을 확대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1894년 음력 9월 1일(9.28),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와 수접주 유하덕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하동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섬나루에 진을 쳤다. 353)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에 집결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하동의 관군을 비롯한 민포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하동 지역은 생각보다 훨씬 엄중하게 방어하고 있어서 강을 섣불리 건널 수 없었다. 이에 대접주 김인배는 다음과 같은 기발한 꾀를 내어 농민군의 용기를 북돋았다. 인배는 부적 한 장을 그려 수탉의 가슴에 붙여 백 보 앞에다 놓고 자신의 심복 포졸에게 총을 쏘도록 하였다. 이에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닭은 반드시 총알을 맞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접장들께서는 저 의 부적을 믿으십시오”라고 하면서 연달아 세 번을 쏘았는데, 하나도 맞지 않았다. 적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부적의 효험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부적을 옷에다 붙이고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넜다(황현, 『번 역 오하기문』, 234쪽) 김인배는 부적을 이용하여 동요하려는 농민군들을 단단히 뭉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손쉽게 섬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들은 두 부대로 나뉘어서 한 부대는 얕은 여울을 건너 하동부의 북쪽에 진을 쳤으며, 다른 한 부대는 광양의 망덕 나루터에서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가 하동부의 남쪽에 진을 쳤다. 당시 하동부는 화개의 민포군을 중심으로 사수하고 있었다. 하동부사인 이채연은 농민군의 원한을 산 까닭에 이미 대구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하동의 민포군은 전 主簿 金振玉을 민포대장에 추대하여 통영의 大碗砲 12문으로 무장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사수할 생각이었다. 이들은 鞍峰(하동 관아의 351) 이광린 신용하, 앞의 책, 144∼145쪽. 352) 황현, 『번역 오하기문』, 233쪽. 353) 이하 하동 점령과정은 『번역 오하기문』(233∼236쪽)을 주로 참고하여 정리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