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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하여금 농민군을 유인하여 광양으로 내쫓았다. 하동의 장사군 중에 광양의 농민군을 추종한 사람들은 모두 광양으로 도망하여 영호도회소 농민군과 합류하였다. 하동의 장사군 중에는 죽음이 두려워 감히 하동으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346) 더욱이 하동부사 이채연은 하동지역 장사군의 집과 처자식을 모두 불태웠다. 광양으로 쫓겨난 하동의 장사군들은 이 소식을 듣고서도 발만 동동 굴리며 이를 갈 뿐이었다. 347) 그러던 차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전격적으로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의 눈치를 보아가며 농민군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특히, 일본에 우호적인 개화파가 득세함으로써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대책이 신속하게 수립되었다. 농민군 역시 일본과 개화정부에 맞서는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드디어 1894년 음력 8월 25일 남원에서 농민군대회가 열렸다. 약 5만 명이 참가한 남원의 농민군대회에서는 향후의 노선이 결정되었다. 즉, 농민군의 수뇌부는 개화정부와의 유화적인 상황을 청산하고 斥倭를 표방함과 아울러 개화정부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지금까지 수 개월간 유지되어 온 정부와의 화해국면이 무너졌다. 348) 전봉준과 김개남은 새 곡식이 수확되는 10월이 오기를 기다려 起包하기로 하고 각 도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냈다. 349) 그리하여 전라도의 각 군현에서 활동중인 동학농민군들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10월 하순을 전후하여 전북 삼례에는 10만여 명의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순천의 박낙양은 5천여 명을 동원하였다. 350) 그는 전봉준을 추종하였으므로 통문을 받자마자 자신을 따르는 농민군과 같이 삼례로 달려갔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경상도 서부지역으로 진격한 김인배와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낙안군의 일부 농민군과 보성지역 농민군이 영호도회소의 낙안읍성 공격에 저항한 사실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문제로 보인다. 즉, 이들은 전봉준을 따르는 세력일 가능성이 많으나, 고흥과 낙안의 나머지 세력은 물론 김인배의 영향아래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 반발과 갈등이 표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2차 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접과 북접의 동학조직이 연합함으로써 논산에는 최소한 10만여 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출동하였다. 음력 10월 16일(양 11.13), 전봉준은 논산에서 兩湖倡義領袖의 이름으로 창의를 알리는 고시문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보내어 동참을 호소하였다. 음력 10월 하순, 농민군은 공주 熊峙(곰티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또한 전봉준은 전국의 동학조직에 통문을 보내어 분발을 촉구하였으며, 12월 8일에는 경군과 營兵들에게도 각각 척왜를 표방한 고시문을 발송하였다. 그는 관군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346) 황현, 『번역 오하기문』, 203쪽. 347) 위와 같음. 348) 김양식, 앞의 논문, 『호남문화연구』 23(1995), 63쪽. 349) 이광린 신용하,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일지사, 1982), 142쪽. 350) 오지영, 『동학사』, 4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