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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99 1890년에 역시 광양 출신인 劉壽德으로부터 동학을 전수받았다. 335) 이렇게 보면 광양에는 적어도 1890년 이전에 동학교인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동학의 전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동학교인의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취회에 적극 가담하였다. 조두환의 경우, 갑오년에는 接司로 활동하다가 그해 말 백운산으로 도망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물론 이후에도 그는 동학교인으로서 크게 활동하였다. 336) 물론 보은취회에 가담하는 광양의 교인이 많았다는 사실과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동학의 呪文을 광양 사람이 지었다는 말이 경상도에 퍼져 있었다는 점 337) 도 사실여부를 떠나 역시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광양으로부터 경상도 서부지역으로 동학이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집강소 시기에 광양의 농민군과 하동 진주의 농민군 사이에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그리고 광양 출신으로 영호도회소에서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1894년 음력 12월 초순, 농민군에 대한 진압이 무자비하게 자행될 당시의 명단이다. 이들은 주로 봉강 인덕 사곡 옥룡 칠성 우장면 지역의 접주와 성찰, 그리고 일반 농민군들이었다. 특히, 섬계역의 경우에는 도접주 全甲伊와 도집강 丁洪燮 등을 비롯한 29명의 이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광양 농민군의 신분이나 경제적 기반 등은 잘 알 수 없다. 최후항쟁 당시 체포·전사한 농민군의 일부에 대한 출신지 및 직책 정도를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아울러 광양에서 활동하다 죽임을 당한 사람을 포함하여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광양에서 사망한 농민군 명단> 338) 335) 허남호, 「고소암조두환씨를 추도함」, 『천도교회월보』 279(1935년 9월호), 37쪽. 336) 위와 같음. 337)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69쪽. 338) 이 표는 「광양섬계역포착동도성명성책」과 「광양현포착동도성명성책」 그리고 「광양염문기」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지역명 직 책 명 단(사망일자) 비 고(사망일자) 전북 금구 영호대접주 김인배 효수(음 12.7) 순천 영호수접주 유하덕 효수(음 12.8) 광양 순천 수접주 金鶴植 포살(음 12.11) 蟾溪驛 도접주 全甲伊 참수(음 12.10) 도집강 政洪燮 참수(음 12.10) 동몽 趙伯元 포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