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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수홍은 “제가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잘못은 김접주에게 있습니다. 오늘날 도인이 있고 관리는 없 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십니까.”라고 대답하였는데, 대개 인배가 명령을 거절하였다는 것을 지목한 것 이다. 개남은 못들은 척하고 大棍 30대를 때리고 감영의 옥에 가두었다.(『번역 오하기문』, 272쪽). 이수홍이 부임할 당시 순천의 관아는 이미 김인배를 비롯한 영호도회소의 수뇌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도호부의 관아가 영호도회소의 활동 근거지로 이용된 것이다. 당시 관원들은 농민군의 눈치나 살피는 천덕꾸러기나 다름없었으며, 신임부사조차도 빈 관사에서 유생들과 詩文이나 지으며 소일하자, 순천부민들이 그를 비웃었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는 1894년 음력 10월 경 순천부사 이수홍이 전주로 가는 길에 마침 김개남을 만나 수모를 당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도인이 있고 관리는 없다”는 그의 말 가운데 순천부사로서의 그의 위치가 어떠하였는지를 잘 알려준다. 332) 즉, 당시의 순천 지역은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인배의 지휘하에 영호도회소는 순천지역을 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순천과는 지척의 거리에 있던 광양은 영호도회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광양은 경상도 서부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영호도회소의 전진기지였던 곳이다. 333) 그런데 광양은 1869년과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무장항쟁이 일어났던 곳인 만큼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따라서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적극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영호도회소가 광양을 강제 점령하거나, 혹은 영호도회소의 지도부와 광양의 농민군 사이에 알력이나 갈등, 대립적인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광양의 농민군 역시 영호도회소의 지도아래 긴밀하게 협조하며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즉,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와 수접주 유하덕의 아래에 광양·순천수접주로서 金鶴植이 활동한 점 334) 으로 보아 그러하다. 광양과 순천을 동시에 관할하는 수접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이 지역이 영호도회소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광양은 영호도회소의 영남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하동이나 진주로 진출할 때 항상 광양을 근거지삼아 섬진강을 건넜으며, 후퇴할 경우에도 반드시 광양으로 되돌아왔다. 그만큼 광양은 영호도회소의 경남 서부지역 진출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양의 농민군은 규모나 활동면에서도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광양지역은 일찍부터 동학이 번성하였다. 1890년대를 전후하여 동학교인이 급신장한 것이다. 광양 봉강출신의 趙斗桓(1867∼1935)은 20대의 나이인 332) 한편, 이수홍의 이임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승평지』에도 그의 이임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전주 감 영에 구금중 동행한 순천의 좌수 정 아무개가 대납한 3천 냥의 뇌물로 풀려나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고 한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72쪽). 이로써 볼 때 이수홍은 전주에서 풀려나자 곧바로 서울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333) 전남일보 「동학 100년(27)」, 1994년 7월 13일자. 334) 「광양현포착동도성명성책」, 『잡책철』(규장각 소장, 2197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