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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향토 문화층서 @ 돌마 마을 지( 下) 아지게 되고 그들이 태자가 왕이 된 후에 더욱 강력한 충성심으로 시종 일관하기 때푼에 국가의 기본정책인 강병부국(彈兵富國)의 기틀을 확보 하는 데 최고로 훌륭한 정책이기 때문에 태자에게 군사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러한 태자가 거쳐하며 백제의 군사를 통솔하고 훈련시키던 세자궁 터가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281번지에서 295번지 일대에 아직도 남아 있 다. 세자궁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백제의 군사문화는 물론 백 제와고구려,그리고신라의 문화가혼입되어 한민족의 발전적인문화를 창달한 유서(由績) 깊은 고장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백제시대부터 군사훈련을시킬 때에 연료는나무밖에 없던시절이라서 쥬드로장작을때 어 장병(將兵)에게 먹일 밥이나 국을 끓여 먹였었다. 우마(牛馬)에게 먹 일소죽을쓸 때에도장작을밸수밖에 없었던것이다. 백제시대에도 군사의 수효가 수만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시 대 실록의 기록은 10여만의 대군이 대열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열을거행할때마다왕을비롯한왕족들과삼공육경(三公六뼈)의높은 벼슬아치들과 군 지휘관인 징L군들을 비롯한 군사들의 식사를 마련하려 면수백마차분의장작을때어야했고, 또우마의소죽을쑤어먹이는데 필요한 장작달 포함하면 엄청난 장작이 소비되었으나 빨감으로 사용한 후에 나오는 쫓은 뱃물에 버리고 갔는데 그것은 물의 정회체(博化簡 U)로 는 숭이 최고인지라 숭을 물에 버리어 뱃물을 정화하였다. 조선시대 초 · 중기까지는 수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던 대열로 해가 거둡할수록 많 은 숭이 뱃물 속에 널브러져 있어서 시내의 이름을 숨내라고 하였다. 그 러다가 한문 표기로 숭 탄(밟)자와 내 천(川)자로 탄천(벚川)이라고 쓰게 되었다. 그런데도 『성남시사(城南市史) 』 에는 웬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東 方)삭이’ 가 숭을 빨다가 저승사자에게 잡혀가서 숭내라고 하였다고 기 록하였는데, 삼천갑자 동빙삭이에 대한 구전 전래설화의 채집(採集)기 좋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