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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향토 문화층서 @ 돌마 마을지(下) 으나 일부 구간은 식민통치의 목적에 따라 노선이 변경되었는데 성남지 역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1 차 치도사업 기간에 서울부 -AJ- 간 노선 가 운데 서울-이챈 간 40km가 2 등 도로로, 이천장호원 간 29.4knt가 1퉁 도로 로 개수되었다. 성남의 서쪽으로 수원로와 제주로를 기본으로서울-목포 선 1둥도로가 경부 철도와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서울-시흥」수원-천안 방 향으로 놓였고, 남쪽으로는 수원용인-이천원주강롱을 잇는 2 동도로가 놓였다. 이로써 일제시대 성남은 대로가 경유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환상 ( 環狀)으로 간선도로망이 구축되었고, 이들 도로는 모두 서울 -수원 간 1 번 국도, 수원-이천간 42번 국도, 서울-이천 간 43번 및 3번 국도로 지정 되었다. 19세기가끝나기 직전 시작된 한국의 철도시대는 해방 후 서서히 자동 차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던 1970년대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 도의 동장은 지역구조를 재편하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 만유사이래 첼도가지나간적이 없는성남은조선 시대의 주요교통로 로서 번영했던 모습에서 점차로 멀어지는듯 했다. 그러나 역사적 잠재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철도와 주요 국도가 빗 겨간 성남은, 1970년대 우리나라 교통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경부고속도 로 노선을 유치하기에 가장 적합했고, 1990년대 분당 개발파 더불어 서 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두 고속도로가 교차히는 판교는 대 로였던 동래로와 봉화로를 이어주던 기능을 그대로 되살려 교통로의 역 동적인 생명랙이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판교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93번 지방도화는퉁급이 낮음에도도로 폭이 왕복8 차선에 달할 정도로 교통량이많다- 한편 단순히 도로망의 확충 뿐 아니라 대중교통 수단으로서의 지하철 시대가 개막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성남시는 인구 100만에 가까운 대도 시로성장하게되었다, 앓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