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page

“동란 1년 반에 무려 800만의 전재(戰%)피난민이 생겼고, 사회부의 부단 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루 3홉의 배급도 1개월에 불과 20일분 밖에 받지 못 하고 있으며, 월동용 연료와 피복을 마련하지 못한 80만에 달‘5}는 이들 피난 민은 정부의 조속 적절한 대책이 없는 한 동사와 기아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 다.” 이어서 돌마면 지역의 주민 생활상을 보도하고 있는데 팎주군 구천면 수용소에는 피난민 이 10여만 명에 달하였고 이 가운데 8,〔)()()여 명의 노 부유(老婚助);;;~} 는 서부면(현재 서하남 감북동 일대) · 돌마면 · 낙생면에 각각 분산하여 원주민 주택과 움집에 수용되고 나머지 1만 8,000여 명의 26 피난민은 구천면에 그대로 체류 중에 있었는데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 간에 걸쳐 1일 3흡 배급도 한 달에 20일분 밖에 받지 못하고 있으며 매인 향토 문화층서 @ 돌마 마을지( 下) 당 의류 1점 반, 광목 반마, 솜 반근, 소금 반근, 4개월분 부식대 도합 500 원그리고매세대담요 0.5매, 비누 0.7개의 율로배급되고있는실정이었 다. 이처럼 서울지구의 피난민들 또한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경기 도지역의 피난민들은그나마서울지역의 수준에도못미치는구호지 원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돌마면 지역의 피난민들은 움집에서 겨울을 나야했을정SC.로처참하였다. 한편 한국동-란 이후 경제는 직물공장이 들어서면서 지역경제를 이끌 어 갔다. 돌마변 지역에서는 1958년에 발간된 『전국기업체 총람』에 의하 면 면장을 지낸 바 있는 이근학 씨가 ‘돌마직물공장(突馬織物I場)’ 을 운영하고 있았음을 알 수 있다. 돌마직물공장은돌마면 여수리에 있었으 며 소창직물을- 생산하였다 소창직물은 변에서 완전히 방적되지 않은소 면사로 줄무늬나 바둑무늬를 낸 성글게 싼 평직의 직물을 말하며, 거즈 나 하얄고 앓쓴 면으로 만들어진 천으로서 흡수율이 뛰어나고 항균성이 있으며 성글게 짜여져서 음식물의 액을짜는 데도쓰인다. 좋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