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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참여한독립운동가이다. 지명수배가풀려 귀국후에도문중인과 지 인(知A)들을 통하여 독립정신(獨立精神)의 고취는 물론 자신과 지인들 의 재산 을 비멀지하조직(秘密地下組織)을 통하여 독립자금(獨立資金)으 로 지원하는 꽁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였다. 묘소는 율동(票洞) 산 2-1번지에 숙부인(淑夫A) 콕부공씨(曲뿔孔民) 와 신좌(辛坐) 합조(合%)이다. 한영원(韓永元, 1854년∼1920년) 휘(譯)는 영원(永元)이고 자(字)는 중선(重善)이다. 조샌말기(朝蘇末 期)의 문신(文댐)이다. 182 고종(高宗) 23년(1886년)에 정시문과(底試文科) 병과(困科)에 급제(及 第)하여 승정원 기주서(承政院 假注書)를 거쳐서 사간원 정언(司課院 正 항 토 言)을 지내고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과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쳐서, 사간원 헌납(司誠院 敵納)을 지낸 후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 義)가되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는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찢橫)을 지냈고 1904년에는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이 되었다가 봉상사 전사(奉常司 典事)가 되었고, 1906년에는 홍문관 시강(弘文館 待講)이 되어 학문(學 問)에 힘쓰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퇴임(退任)하고 낙생면(樂 生面) 백현리(拍視里)에서 후학(後學)을 가르치며 여생(餘生)을 보내었 다. 묘소는 서현동(書|뺑洞) 산 47번지 간좌(良坐)에 숙부인(淑夫A) 여흥 이씨(呂興李民)와 합조(合%)이다. 문화층서 @ 돌마 마을지( 下) 한순회(韓順會, 1885년∼1961년) 자(字)는 보경(輔쩨)이고 호(號)는 제암(露흉)이다. 평택(平澤) 포승면 (浦承面) 내기리(內基里)에서 출생(出生)하여 율리(票里)에 한영우(韓永 앓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