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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遠近知友)들에게 찬탄(讀僅)의 대상(對象)이었다고 전해 온다. 묘소는 율통(票洞) 산 9 2번지 내 산믿1골(山幕감) 유좌(멍坐)에 숙부인 (淑夫A) 전주(全州) 이씨(李民)와 합조(合%)이다. 175 세거성씨와 인물 ·한동열 한준(韓俊, 1744∼1782) 휘(譯)는 준(埈)이고 자(字)는 자장(子章)이다. 아버지 항빈('直#)에게 학문(學問)을 사사(師事)하여 학문(學問)이 높은 경지(境地)에 이르러 문 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성균관(成均館) 진사에 보임(補任)되었으나 높은벼슬에는뜻이 없어 곧바로낙향하여 향리에서 문중서당에서 후학 을 가르치며 무궁한 학문의 진리(훌理)를 탐구하며 일생을 보냈으나 사 림(士林)과 세간(世間)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심오(深與)한 학문(學問)이 사장(死藏)됨을 만타까워 하였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天折)하여 그 의 심오(深與)한학문의 경지를야는사람들이 더욱 안타까워 하였다. 묘소는 율동(票洞) 산 9-2번지 해좌(家坐)에 숙인(淑A) 전주(全州)이씨 ( 李民)와 합조( 合化)이다. 한명기(韓命훨1 1763∼1793) 휘(譯)는 명기(命變)이고 자(字)는 치소(權짧)이다. 성균관(成均館) 진 사(進土)이던 아버지의 영향(影響)을 받아 학문(學問)의 집대성(集大成) 을 이루었으나 끝내 환로(富路)에는 나가지 않았고 향리(~많里)에서 학문 연구(學問冊究)에만 전념(專念)하여 기호(鍵湖) 사림(士林)의 딴탄(讀僅) 의 대상(對象)이었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고 정오흡(正五品) 통덕랑(通德郞)찰 제수(除授)받았으나 사양(蘇讓)하였다고 첸해 온다. 젊은나이에요젤(天折)하였다. 묘소는 율동(票洞) 산 2-1번지에 건좌(乾坐)에 공인(했A) 진주(쯤州) 강씨(姜民)와 합조(合~[S)이다. 형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