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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향토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 T) 와 도기 14상차, 자기 12상자 등의 토기와 자기류, 기와 250상자 이상의 분량, 석기 6점 , 말뼈 14점, 슬래그 2상자 등이 출토된 것으후 보고되었 다. 이들 유물은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든 시기에 걸친 것들 인데 특히 돌흐않촉은 청동기 시대의 것이며 고려시대의 막새기와나 청 자접시 등이 발굴되어 오래 전부터 생활주거지로사용되었음을보여주 고 있다. 더구나 ‘숭가마 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어 숨팔이라는 지명 과 더불어 탄천(벚JI I)의 지명유래를 밝혀줄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 공해 주고 있다. ‘판교 · 도촌 지역에서 발굴된 문회유산의 보존방안’ 을 주제로 성남문화원에서는 10월 17일 학술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그리고 한강 일대는 백제가 군대를 크게 사열(종閔)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을뿐아니라조선 시대에도 역대 임금들이 군대뜰사열하거나 군사 훈련을 겸한 사냥과 강무(講武) 행사가 벌어졌다. 이 때에 수만의 군사가 사용한 밸나무와 숭에서 탄천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을 것이다. 분당구서현동 일대에서는백제시대의주거유적이확인된바있다. 이매사거리의 이진봉(해발 117.Sm)의 정상부인 이곳은서현동산6번 지와 이매동 ~!-53-1번지에 걸쳐 있다. 등산로 주변에는 곳곳에 경질 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체육시설이 설치되면서 절단된 단면에 주거지의 한 단 면이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주거지는 3곳이며, 출토된 유콸은 경질토기 호(뚫)가주류를이루고적갈색이나회갈색의 연질토기도보인다. 그리고 백제 양식의 고배(高杯)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한강 유역 의 백제는 그 후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고구려의 국력이 강성해지 면서 수도를 뚱진으로 옮겨 가야 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한 강유역은 진흥왕 14년(553)에 광주 땅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고, 다시 한산주 또는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 (漢州)라고쳤다. 광주(廣州)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부터이며, 고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救)을 두었을 때에도 광주는 그 하 .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