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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9 세거성씨와 인불 ·한동열 군량미(軍樓米)가 부족하게 되자 외교에 밝은 한목사(韓收使)가 청국(淸 國)과 내통하였을 것이라는 모함에 빠지자 이시백( 李時白), 이시방(李時 方) 형제와 원두표(元斗杓) 퉁이 사실은 그와 같지 않음을 역설하고 비호 (J!E讀)하여 파직(罷職)만 당하여 낙향하였다. 낙호 t 하여서는 문중서당(門中書堂)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활터를 만들 어 활 쏘는 시범을 보이며 장정들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그때에 활터를 만들었던 곳을 지금도 ‘활터거리’ 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인조(仁祖) 20 년에 행호군(行護軍)이 되었고 그 뒤 지돈령부사(知敎寧府事)에 이르렀 고 인조(仁祖) 24년 7 월 8일에는 80세가 넘었으므로 기로소(홈老所)에 시 입(始入)하게 되띤서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교지(加 資敎읍)를받았다. 할아버지(韓智源)와 아버지(韓述) 그리고 삼촌(韓|題)의 시문을 모아 『삼체집』(三體集)을 만들었는데 서문(序文)은 영의정(領議政) 청음(淸 陰) 김상헌(金尙靈)과 대제학(大提學) 동주(東洲 |) 이민구( 李敏求)가 썼는 데 청주한씨(淸州韓IX) 문정공파 파보(文靖公派 派諸)와 삼등공파 파보 ( 三登公派 派諸)에 전문(全文) 기록되어 전하여 온다. 또 이승소(李承B) 를 기리는 『 삼탄집』(三離集)에도 『 삼체집』(三體集)에 대한 기확이 전(傳) 해 온다. 효종(孝宗) 3년(1652년) 86세(歲)를 일기로 졸(쭈)하였다. 묘소는 율동(票洞) 산 9-1번지 지좌(子坐)에 정부인(貞夫시 고령박씨 (高靈朴民)와 정부인(貞夫A) 동래정씨(東菜鄭民)와 경향각지(京獅各地) 에서도 드물게 렐 수 있는 ‘품자(品字)형식’ 의 삼조묘(三J않;)이다, 공 (公) 묘(훌)가 상(上)이고 하 · 좌측(下 · 左測)이 고령박씨(高靈朴民) 묘 이고하 · 우측(下 · 右測)이 동래정씨(東英鄭IX) 묘이다. 한명직(웹明直, 1576∼1613) 휘(譯)는 명직(明直)이고 자(字)는 직경(直쩨)이다. 선조(宣祖) 9년 (1576년) 구월(九月) 팔일에 태어났다. 부친 한술(韓述)의 높은 학문(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