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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세거성씨와 인풀 -한동 열 府持平)으로 옮겼다가 3월 5일에는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換)이 되었고 3월 10일에는 홍푼관 교리(弘文館 校理)가 되었다. 3월 26일에 다시 사헌 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겼다가 7월 2일에 홍문관부교리(弘文館 副 校理)를 제수(除授) 받았다가 7월 18일에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가 되 어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겸(暴)하였다. 8월 28일에는 병조정 랑(兵費正郞)으로 옮기고 11월 12일 에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 로옮겼다가 명종(明宗) 5년 2월 19일에는 다시 병조정랑(兵費:iE閔)이 되 었다. 동년(同年) 4월 29일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가 되어 9월 5일에 는 경연 시독관(經範 待讀官)을 겸하였다. 9월 21일에는 사간원 헌납(司 課院 敵納)이 되었다. 명종(明宗) 8년에는 사림(士林) 최고(最훤)의 영예 (榮響)인 사가독서(眼家讀書)에 선발(選技)되었다. 그러나 당쟁(黨爭)에 휘말려 윤원형(尹元衛) 등 권신(權멀)에게 아첨 (阿짧)하여 탐학(슐뽑)을 일삼았다는 탄핵(彈쳤)을 받아 사직(辦職)하였 다가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어 명종(明宗) 10년 사월(四月)에 확관(復官) 이 되자 그 높은 지개(志擬)에 세인(世A)이 모두 감탄(感歡)하였다. 정삼 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 통훈대부(通힘||大夫)로 승차(I혈差)따여 인천 부사이二川府使)를 지냈고 다시 명종(明宗) 10년 6월 6일에는 당쟁(黨爭) 에 거친 세파(世波)에 못 이겨 다시 파직(罷職)을 당하고 낙향(落微)을 하 였다가 명종(明宗) 12년 12월 6일에 통훈대부(通힘||大夫) 성천부사(成Jll 府使)가 되었다가 명종(明宗) 13년 8월 14일에는 통훈대부(通힘||大夫) 박 천군수(博川那守)를 제수(除投)받았다. 문장(文章)에 뛰어나 이(李) · 두(社)(李太白, H收之)의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손자(孫子) 한명욱(韓明閒)이 엮은 『삼체집』(三體集) 서문(序 文)을 쓴 대제학(大提學)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와 영의정(領議政) 청음(淸陰) 김상헨(金尙憲)은 윤결(尹灌)과 재명동시(짧名同時)하였다 하고 송(宋)나라의 천하 문장가(天下文章家)인 삼소(三蘇 , 소순(蘇뼈)과 두 아들인 소식(蘇載)과 소철(蘇敵) 등 삼부자(三父子)를 일컬잠)에 견준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