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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향토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T) 繼禮)와 아버저 사신(士信)의 영향을 받아 학문(學問)에 심취(深解)되어 문과에 급제하고 환로(富路)에 나가 청렴근검(淸嚴勳險)하고 강직(剛直) 하여기는부서(部著)마다관료사회와백성들사이에칭송이자자하였다 고 전해 온다. 여러 관직을 거친 후에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으 로 통훈대부(通힘II大夫)인 옥천군수(決川那守)를 지내고 증직(體職)으로 동급(同級) 내직(內職)인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 通禮)를 제수(除授) 받았다. 묘소는 율동(棄洞) 산 2-1번지에 숙인(淑A) 청풍(淸風)김씨(金民)와 신 좌(辛坐)로쌍분(雙境)이다. 한석 (韓碩, 1479 ∼ ?) 휘(譯)는 석(碩)이고 자(字)는 거경(巨뼈0)이다. 남달리 무예(武藝)가 출 중하여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각종 대소직책을 성실히 수 행하여 일찍이 원수(元帥)급 자질을 갖추었다고 칭송지칭(稱煩指稱)을 받았다. 중종(中宗) 13년(1518년)에는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경 상수사(慶尙水使)를 지내면서 공훈이 찬란하여 교통수사(폼洞水使)로 옮겨 여러 해 똥안 강화(江華)에서 살았다. 이어 훈련원도정(힘||練院都正) 을 지내다가 중종(中宗) 29년(1534년)에는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겸직 (暴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總府副總管) 으로서 오위Gi衛) 중에 좌위장(左衛將)을 맡아 군사훈련(軍事뢰||練)에 몰입(沒入)하였으나 불행(不幸)하게도 조세(早世)하자 모재(幕齊) 김안 국(金安國)이 훔곡(f動哭)을 하며 지었다는 만장(輪章)의 내용을 소개(紹 介)한다. 桓桓才武冠첸倫, R폐銀威尊早致身, 淸操足買J流1tt範, 륨{뤘져훨엠[~古A淳. 환환재무관군륜, 곤월위존조치신, 청조족위류속범, 진회감배고인순. 씩씩한무의 재간이 많은사람들의 으뜸으로 앓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