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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문화총 서 @ 지 몸이 쇠약ir}여 자주병에 걸리곤하였다. 그러면서도녹봉(禮棒)을받 으면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계속하였다 . 어느 날 상닦부원군(上堂府院君) 한명회(韓明漫)의 집에서 대소(大小) 일가가 모여 문중회의가 열렸는데 공의 어렵고 병약한 이야기가 나오 자, 상당부원꾼 한명회가 ‘나의 잘못이다” 하고는 문서를작성하여 흥인 문(興仁門) 밖 고암리(鼓岩里 • 現 安岩洞 高麗大 近處)에 ‘논, 밭 열섬지 기(約4萬핸)를 억지로 받게 하였는데, 논은 받았으나 소출은 집에 못 들 여놓게하고인근에 병든사람이 있는집이나가난한선비의 집과고아 (孤兒), 과부(흉歸)등 살림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공의 뜻이 유업으로 가문에 계승되어 인근이 편안하게 살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마쉴?의 이름을 ‘편안할 안(安)자’ 로 바꾸어 ‘안암동(安岩洞)’ 으로부르게띄었다. 공은 일품악 품계에 있으면서 궁색하기가 극에 달하여 자녀의 혼수걱 정을 하였으며 집은 언제나 누추하였으나 글 읽는 소리만 들릴 뿐 항상 조용하였다한다. 성종이 여러 번 공신전(功民田)을내리려 하였으나극 구 사양하고 ‘서평군(西平君)’ 이란 봉작(封醫)도 사양하였으나 가납(嘉 納)되지 않았따. 성종의 끈질긴 사패지(陽牌地) 하운문(下問)으로 말년에 야 “굳이 묻힐 자리를 주시겠다면 대왕의 태실(貼室) 옆에 한 자리를 주 시면 묻힐까 합니다”하고 말하니 성종은 쾌히 웅락하고 자신의 태실을 광주군 경안면(慶安面) 태전리(始田里)로 옮기고 돌마면(突馬面) 율리 (棄里) 일대를 사패지로 내려주어 현재 능침Cl埈寢) 자리에 묻힐 수 있었 다. 조선왕조실록(朝蘇王朝實錄)에 실려 있는 서평군(西平펌) 한계희(韓 繼禮)의 졸기(후記)를 상세히 살펴보면, 세조가 잠저(濟邱)에 있을 때 문 종(文宗)께 말씀드리기를 “한계희(韓繼禮)가 경서에 밝고처신을잘하여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를 중(重)히 쓰십시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임종할 때에 지손들에게 타일러서 후장(J享舞)하지 148 돌마 마을지(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