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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향토 문화총서 @ 돌마 마을 지(下) 디움을 누려 다시 유구(뻔久)할 것을 기약하고후세에 공효(功댐)에 힘쓸지어 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신철권(功멀鐵卷)을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공신으로서 의 예우를 받음 과 동시에 사후에도 왕들로부터 후대에 영구히 부조지전(不跳之典)의 예우 를 받는 영광누리게 된 것이다. 이때 왕명으후 종친규찰조문(宗親쇄察條文)을 지어 올렸고, 간경도감 (刊經都藍)을 정파(停罷)하자는 중론이 일자 정파(停罷)릅 해서는 절대 로 안 되는 사유와 고경(古經)을 인용한 이론으로 반대히춘E 소신의 말씀 을올려 왕이 가납(嘉納)하였다. 세조대왕(世祖大王)의 능침(|埈寢)인 광롱(光陸)의 원찰인 봉선사(奉先 놓)의 대종(大鐘, 現在 雲歡山 }應燈좋에 保存中)을 만들 때에는 동역제조 (童投提調)가 되어 대종불사(大鐘佛事)를 성공리에 마치았다. 이어 성종 원년에는 유병한 낙산사가(落山츄記)를 썼다. 성종 1년(147이에 순성명 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쯤濟住理功~) 2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소격 서(昭格暑) 제조(提調)를 겸하였는데, 내전과 종실의 이윈을 원활하케 하 여 왕실의 염원과 안위를 지키는데 일조하였다. 성종 2년(1471년) 4월 6 일에는 팔공신(八功닮) 회맹(會盟)에 네 아들과 참여하였다. 성종 7년 (1476)에는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하면서 의서류취(醫혈類聚) 찬술에 힘써 성종 8년(1477)에 의서류취(醫書類聚, -名 醫方類聚) 30질(質)을 지었다. 성종 9년(1478)에 숭록대부(뿔視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 贊成) 겸 지청연춘추관사(知經鐘春秋館事) 세자사(世子師) 좌빈객(左흉 客)되어 성종의 상빈(上寶)으로 국기중대사에 중심역할을 하였다. 성종 12년(1481)에는 다라니경(多羅尼經)의 언해를 하였고, 두사언해(社詩證 解)를 찬술하였다. 선종영가집(輝宗永嘉集)을 언해하였다. 성종 13년 (1482)에 이극배(李克培)와 복수(複數)로 좌의정에 의망(擬望)되었을 때 에는 이극배(李克培)와 함께 극구사양(極口解讓)하여 젊은r 윤필상(尹 꽤 좋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