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page

144 향토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 下) 년)에 세조가병이 위독하여 급하게 공을내전으로부르시어 독대(獨對) 를 한자리에서 세조가 공을 시켜 세자인 예종(짤宗)에게 딸을 전하게 하 기를 ‘내가 평일에 글을 지어서 조훈조장(祖訓條章)과 같이 너에게 내려 주려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미 할 수가 없으니, 대강(大網!)만 말하겠다 너는마땅히 마음을가다듬고똑똑히 들어서 공경히 받들고 게을리 하지 말라. 첫째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섬길 것(敬天事神)이며, 둘째 선조(先 朝)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奉先事孝)이며, 셋째, 용도(用度)를 절믿f하고 백성을 사랑할 것(節用愛民)이니 나의 말은 이것뿐이다.” 하고 는 공에게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고 하여 공이 “이것은 대사 (大事)이니 성상(聖上)의 생각을 신중히 하시고 원컨대 안쩡을 하시며 조 리하소서” 하면서 적극 만류하였으나 재차 명하여 대보(大寶)와 곤면(흉 옳)을 세자인 예종(審宗)에게 전수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공이 예종에게 배례(拜禮)를 드리도록 청하고 예종이 세조에게 배례를 드리고 나자 예 종을 인도하여 수강궁(壽康宮)의 문에 나아가 군신의 하례를 받게 하였 다. 이튿날 세조가승하하시니 공이 십여 일을통곡하며 음식)을입에 대 지 않았다. 세조가붕어(범維|])하자국장도감제조(國舞都藍 提調)로광릉 (光|埈)의 산역(山投)을 격에 맞게 잘 봉행하였다. 예종 원년(1468) 9월에 남이(南↑읍)가 병조판서(兵費判書)에 제수되었을 때, ‘남이(南↑읍)는 병권 을 맡길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라는 충언에 남이를 의산군(宜山君) 겸 사복장(司傑將)으로 즉시 교체하게 하였다. 예종 1년(1469년) 5월 20일에 추충정난익다l공신(推忠靖難翊數功닮) 3등에 녹훈되고 서평군(西平君) 으로 봉군(封君)되었다. 실록에 있는 익대공신(寶載功멀) 꼬서 내용을 소 개하면다음과같다. 추충 정난 익대공신(推忠 靖難 翊載功§) 숭정대부(겸한政大夫) 행(行) 중추 부 지사(中樞府 知事)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禮)에게 내린 교서(敎書). 「내가 생각건대 국가가 일어날 적에는 반드시 어질고 지혜 있는 신하가 부 앓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