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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세거성씨와 인물 ·한동열 고 중시(體說)되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대간(臺誠)들의 주청(奏請)에 의해 공 (公)의 관작(官蘭이 추탈(追養)되었으나곧하교(下敎)로지손들은각별 히 녹용(錄用)되고 효종(孝宗) 조(朝)에서도 그러하였으며, 영조(英祖) 조(朝)에 이르러서는 정승(政챈) 홍봉한(洪鳳漢)과 판부사(判府便) 김치 인(金致仁), 정조(표祖) 조(朝)에서는 영상(領相) 채제공(蔡濟했)이 공의 억울함을 주청하였다. 1864년(高宗 元年)에 이르러서 벼슬과 시호(說號) 가 회복되었는데 1873년(고종10)에 최익현(崔益鉉)의 상소(上院)로 다시 삭관(혐I]官)되었다. 1908 년(純宗2)에 훈작(勳醫)과 시호(說號)가 모두 회 복되었으니 공이 유명을 달리한 후 287년 만에야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완벽이라 일컬어지는 화씨지벽(和民之聲)은 삼대(三代)의 왕(王)에 이 르러서야 알아보게 되었고 후세에까지 그 구슬과 사연이 전하여지고 있 다. 반드시 사필귀정이 됨을 명시하는 말이라하겠다. 묘소는 서현동 산 63-1 정좌(丁坐)이며 신도비(神道牌)와 공-(公)이 자 술(딩述)한 묘비뜸기(幕陣陰記)가 있다. 저서(著書)는 『신기비결(神器秘짧) 』과 『 진설(陣設) 』 , 『 당초기(當初記) 』 가 있다. 유물은 선조대왕의 교서인 “교 겸 전라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한효순 서(敎 짧 全羅觀察使 兵馬水軍節度使 道센察便 韓孝純 書Y ’와 정승(政캘)만이 사용하던 옥관자(玉冠子)가 보존(保存)되고 있다. 〈참고〉 유교칠신(遺敎七닮) ; 선조가승하하실 때 어린 영창대군을 보호하여 줄 것을 부탁한유영경 한웅-인 박통량서성 신흠허성 한준겸 등 일곱 명의 신하이다 비망기(備忘 記) ; 임금의 명령을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는 기록. 한유겸(韓有澈, 1567년∼1619년) 휘(譯)는 유겸(有謝), 자(字)는 덕익(德益)이다. 형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