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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원심대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신음하다가 1924년 갑자 음 2월 24일 21세의 젊은 나이로 철천지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었다. 혈맹 3인 중 정재원도 고문으로 폐인이 되어 4년 후에 숨져갔고 고재경은 왜경의 감시와 자해를 견디지 못해 가족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잠적하여 행방이 묘연하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지사 정규환의 선대는 신라때 호장 휘 회문을 시조로 의정부 좌찬성 대제학 익정절공 휘 구가 중조이시며 입향조 휘 성규는 문무겸전하여 어모장군이시며 14대조이시다. 12세조이신 행촌공 휘 유문은 현신교위시니 임란때 창의하여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같이 왜적을 토벌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황석산성에 들어가 안의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 양공과 같이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니 아우인 유무 유영 두 분과 아들 이선도 함께 순절하였다. 이와같이 공은 선대로부터 위국충절의 피를 이어받은 명문의 후예이다. 조부님은 휘 수갑이시고 아버지는 휘 문섭이시며 호는 아석이니 한말에 통훈대부 행궁내부주사이시며 어머니는 여흥민씨이시니 백구공의 따님이시다. 공은 5형제 중 막내로 위로 규상 규태 규백 규로 네 분 형이 계셨고 1903년 월 11일 이 고을 상백마을에서 태어나셨다. 공이 가신지 80여년의 시공이 지난 지금 공의 그 장한 실상을 밝히고자 공의조카 백석이 10년간을 하루같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아쉽게도 1심 판결문이 소실되어 확인할 길이 없어 애태우다가 3.1운동사와 정부기록 보존소에 소장된 독립 운동 기록문과 복심법원 판결문 등에 공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비로소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정부에서 1999년 8월 15일 제1809호로 건국포장이 서훈되어 가슴에 맺힌 한을 풀게 되었다. 공의 그 위대한 자취를 후세에 전하고자 백석보가 종방들과 뜻을 모아 2000년 4월 5일 이곳 안의면 이전리 산 459번지에 공의 묘소를 보수 단장하고 그 옆에 사적비를 세우기에 앞서 부족한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선열의 위업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후생의 도리라 생각되어 위와 같이 쓰고 명하나니 오 대한의 아들 정규환은 이곳에 영원히 살아 있으니 겨례의 가슴마다 찬란한 태양같이 살아 있도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꽃다운 젊음을 바친 당신께서는 하늘의 별이 되어 영원히 조국을 수호하소서. 서기 2000년 경진 6월 일 하동 정병국 짓고 하동 정기상 쓰다 애국지사 정규환 사적비 건립추진위원장 경주 김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