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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 석장비(慈通弘濟尊者 四溟大師 石藏碑) 대사의 이름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四溟) 또는 송운(松雲)이라 하였고 성은 풍천임씨다. 1511년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13세에 직지사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1561년에 선과에 합격하였고 특히 시를 잘 지어서 당시의 문인대가들과 시를 교환하여 명성이 크게 떨쳤다. 1575년 선종(禪宗)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서산은 그에게 마음을 닦는 공부를 제시해 주었다. 대사는 크게 깨닫고 지금까지 흥미를 붙여온 문학과 학문에 대한 모든 상념을 버리고 마음공부를 체험하기 위한 고행의 수련을 3년동안 계속한 뒤에 다시 국내 여러 병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대사는 유심사에 있었는데 고성에 침입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을 설득하여 인민을 살상치 못하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피난했음을 듣고 수백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때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므로 이 책임을 대사가 대신 맡도록 나라에 추천하여 대사는 이 승군을 거느리고 명나라 장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는데 참가하였고 다시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하에 들어가서 경상도 의령에 주둔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내렸다. 1591년 봄에 명나라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있는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 적장 청정(淸正)과 세번이나 회담하여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때 청정이 조선에 보물이 있느냐고 물으니 대사는 서슴치 않고 우리나라에는 보물이 없고 당신의 머리가 곧 우리의 보물이다라고 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전쟁이 끝날때까지 대사는 군무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때는 팔공산과 금오산에 성을 쌓았고 또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 마귀(麻貴) 등을 따라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군량조달에 힘쓰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관직을 내렸다. 1601년에 사절로 일본에 가서 가강(家康)과 만나 평화회담을 마치고 우리의 포로 일천육백명을 찾아서 돌아왔다. 뒤에 가야산에 들어가 있다가 1610년 8월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해인사 서쪽 기슭에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제자들은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대사의 화상을 모신 곳을 홍제암(弘濟庵)이라 하였다. 대사가 지은 시문이 많았으나 병란에 분실되고 제자들이 수집한 사명집(四溟集) 7권이 있다. 1612년에 허균(許筠)이 짓고 한호(韓濩)가 써서 비를 세웠는데 이제 이를 한글로 요약하여 이 비를 따로 세운다. / 서기 1979년 12월 임창순 국역 배재식 씀 경상남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