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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曹溪直下、第三十五代法孫喚惺志安之後裔、而法諱震鍾、號龍城。白氏子、系出水原、世居全羅道南原竹林里。父曰南賢、母孫氏。母夢一異僧、著法衣入室、因以有娠。以李朝高宗甲子五月八日生師。 대선사께서는 조계종의 법맥을 곧바로 이으신 제35대 법손 환성 지안喚惺志安 선사의 후예後裔로, 법휘法諱는 진종震鍾이고, 호號는 용성龍城이다. 백씨白氏의 자제로,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대대로 전라도 남원 죽림리竹林里에 살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손씨孫氏이다. 어머니가 비범하고 기이한 승려(異僧) 한 분이 법의法衣를 입고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스님을 잉태하였다. 그리고 조선 고종高宗 갑자甲子(1864)년 5월 8일에 스님을 낳았다. 師生而穎悟、不喜羶葷、每有不忍之行。六·七歲時、見其父釣魚、擇其未死者放之水。父詰之、師曰安忍見其死。父異之。九歲能詩。見兒童摘花、直吟摘花手裏動春心、人稱其才。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였고, 비리거나 매운 음식(羶葷)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마 하지 못하는 행동(不忍之行)도 있었으니, 6~7세에는 아버지께서 낚시하는 것을 보고는, 살아 있는 물고기들을 골라서 물에 놓아 주었다. 아버지께서 그것을 꾸짖자, 스님이 말하길 “어찌 차마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여서 아버지를 놀라게 하였다. 9세에 이미 시詩를 잘 지었는데, 아이가 꽃을 따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꽃을 따자 손 안에서 봄의 마음 꿈틀대네.(摘花手裏動春心)”라고 읊어, 사람들이 그 재주를 칭찬하였다. 嘗告父母以出家、父母初則難之、大事因緣竟莫能遏、遂許之。十九歲入伽倻山海印寺、依華月和尙落髮。後叅義城孤雲寺水月長老、問生死事大、無常迅速、如何見得性。長老曰世屬像季、法遠根鈍、驟難超入、莫若先誦大悲呪、業障自除、心光頓發。師遂信而不疑、自此誦大悲呪、口口聲誦、心心黙念。 일찍이 부모님께 출가하겠다고 알리자 처음에는 부모님께서 반대하였지만, 대사大事의 인연因緣을 끝내 막을 수 없었는지 결국 허락하였다. 19세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서 화월華月 화상和尙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다. 후에 의성義城 고운사孤雲寺의 수월水月 장로長老를 찾아뵙고, “생사는 중대한 일이며(生死事大) 세상은 덧없고 빨리 변하는데(無常迅速), 어떻게 해야 불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장로는 “세속은 말세(像季)이고 법法은 멀어졌으며 근기根機는 둔해져서, 정진精進하여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기가 어려워졌으니, 우선 대비주大悲呪를 외워 업장業障을 사라지게 하고 심광心光이 피어나게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스님께서 그 말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아서 그때부터 대비주를 외웠는데, 입으로는 소리 내어 외우고 마음으로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後至楊州普光寺兜率庵、猛加精進、一日忽疑、森羅萬象皆有本源、我此見聞覺知、從何而生。疑來疑去、疑到十二晝夜、猛覺一念、如桶底脫相似。往叅金剛山無融禪師、具述前緣、融曰不道不是、更叅話頭。 후에 양주楊州 보광사普光寺 도솔암兜率庵에 가서, 맹렬히 정진精進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 문득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모두 근원(本源)이 있는데, 나의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어디로부터 생겨났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끊임없이 의심이 들기를 6일 만에 모든 것을 단박에 깨닫자, 마치 물통의 밑바닥이 빠지듯 훤히 깨닫게 되었다(桶底脫). 금강산의 무융無融 선사禪師를 찾아가서 찾아온 이유를 자세히 말하니, 무융 선사가 말하길 “그 깨달음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다시 화두를 참구해 보아라.”라고 하였다. 師自是叅狗子無佛性話。到兜率庵精進、一日忽然失笑云去年貧未始貧、無立錐之地、今年是始貧、錐也無。正爲我準備語也、自此有契。 스님은 이때부터 ‘개에게는 불성이 없는가(狗子無佛性)’라는 화두를 깊이 생각하였다. 도솔암에 돌아와서 정진하던 어느 날, 문득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작년 가난은 가난도 아니라(去年貧未始貧)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無立錐之地), 금년 가난이 진짜 가난이라(今年是始貧) 송곳마저 없다네(錐也無). 이 말이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말이구나.”라고 말하였고, 이로부터 대도에 계합함이 있었다. 二十七歲於通度寺金剛戒壇、師禪谷律師受具戒及大戒。其後曺溪山松廣寺三日庵夏安居時、閱傳燈錄、至黃蘗法語、月似彎弓、少雨多風處、猛然大悟。不啻於月面佛日面佛話、狗子無佛性話、煥然明白、百千公案了如氷釋。 27세에 통도사通度寺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禪谷 율사律師로부터 비구계(具戒)와 보살대계(大戒)를 받았다. 조계산曺溪山 송광사松廣寺 삼일암三日庵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할 때에 『전등록傳燈錄』을 보다가 황벽黃蘗 선사의 법어法語 중에 “달은 활처럼 휘어 있고(月似彎弓), 비는 적고 바람은 많네(少雨多風)”라는 구절에 이르러 일순간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월면불月面佛도 일면불日面佛’이라는 화두뿐만 아니라,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에 이르기까지 모두 밝고 분명해졌으며, 셀 수 없이 많은 공안公案들이 모두 얼음 녹듯 환하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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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作偈曰 이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金烏千秋月 금오산 천추의 달이요 洛東萬里波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漁舟何處去 물고기 잡는 배는 어디로 갔나 依舊宿蘆花 여전히 갈대꽃에 머물고 있네 更閱一大時敎、以度生爲己任、入泥入水、京城各處、高擧祖令、大闡弘猷。未幾創敎會、特明大覺之玄旨、大欲傳布海外、別設屬會于間島。島且譯華嚴·圓覺·楞嚴·金剛·起信等經、傳廣布內外、其外所著不尠。常好放生、其數不億、可謂兼行六度、無一不備。 다시 일대시교一大時敎를 보고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入泥入水)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조사의 가르침(祖令)을 높이 들고 여래의 넓은 법(弘猷)을 크게 떨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각교회(敎會)를 창시하여, 대각大覺의 심오한 이치를 밝히는 데 특별히 노력하였고, 해외까지 포교를 크게 넓히기 위해 별도로 간도間島에 지회支會를 세웠다. 또한 간도에서 『화엄경(華嚴)』·『원각경(圓覺)』·『능엄경(楞嚴)』·『금강경(金剛)』·『기신론(起信)』 등 여러 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외에 널리 전파하였으며, 그 밖의 저술도 적지 않다. 늘 방생하길 좋아하여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가히 ‘6바라밀(六度)을 함께 행하여 하나라도 빠짐이 없다’고 말할 만하였다. 六十一歲舍利一粒出齒間、色紫光潤、形似頂骨。庚辰春、忽示疾、付囑門徒、吾將滅度、切莫擧哀掛孝。但誦無無上大涅槃、圓明常寂照足矣。二月二十四日黎明、臨終時、門人問當恁麽時、向甚麽處去。師云、匏花穿籬出、閑臥麻田上、微笑入寂、異香動人、一大事因緣至是而畢。世壽七十七、僧臘五十九。翌年、門徒等起塔於海印寺之西麓以安師之舍利、立石。 61세에 사리舍利 한 알이 치아 사이에서 나왔는데, 자줏빛에 윤택이 났으며 모양은 윗머리뼈(頂骨)를 닮아 있었다. 경진庚辰(1940)년 봄에 갑자기 병세를 보이자, 문도들을 불러 “내가 장차 멸도滅度할 것이니, 절대 곡을 하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며, “다만 ‘무상대열반無上大涅槃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라는 구절만 암송해 준다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2월 24일 새벽에 임종 시에 문도들이 묻기를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스님께서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고(匏花穿籬出),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눕네(閑臥麻田上)”라고 대답하였다. 미소를 지으며 입적하였는데, 기이한 향기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 일대사一大事의 인연因緣이 여기에 이르러 마쳤다. 세수世壽는 77세였고, 승랍僧臘은 59세였다. 다음 해에 문도 등이 해인사의 서쪽 기슭에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고, 비석을 세웠다. 而記銘曰。 그 비명碑銘은 다음과 같다. 法貴度生 중생 제도를 귀히 여겨 隨機從緣 근기 따르고 인연 따라 恒沙方便 셀 수 없는 방편 쓰되 無關不玄 현묘하지 않음이 없네 以燈傳燈 등불로써 등불을 전하여 有正無像 형상 없이 바르게 있어 是故大德 이 때문에 대덕스님께선 旣龍且象 용龍인데다 코끼리로다 有師龍城 대선사 용성 스님께선 錐也不留 송곳의 틈조차 안 주고 未說一偈 한 게송도 아니 말해도 山河點頭 산하가 모두 끄덕였네 非珠有珠 사리 아닌 사리 있어 離色離空 색도 공도 다 떠나서 塔而安之 탑을 세워 안치하니 伽倻之中 옛 가야의 땅이라네 知音千載 천년토록 날 알아줄 이가 少亦何傷 적다고 어찌 마음 상하겠나 古桐離絃 옛 거문고의 줄이 끊겼어도 山峩水洋 산은 높고 바다는 넓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