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差脫하고 많은 字劃이 磨滅한 것을 본 스님은 經板補修佛事의 願을 세우고 있던 次 마침내 一九◯六年 一月 望月寺로 스님을 親見하려 온 林尙宮에게 貴重한 聖寶修板佛事를 付託하여 林尙宮의 周旋으로 二萬兩의 內帑金이 令達되었고 王은 佛事의 圓滿한 成就를 위해 擔當官 林某氏와 姜大蓮和尙을 파견하였으며 別官은 金聖業을 寺中에서 任命한 現場監督은 景明과 泳海 두 스님이었다. 그해 九月 德裕山 護國寺에서 修禪社를 열어 衲子를 提接 一九◯七年 三月 山內舊基에 禪院을 創建하고 法泉庵이라 이름하였다. 九月에는 中國에 건너가 北京 觀音寺에서 冬安居를 마치고 一九◯八年 二月 通州 華嚴寺에 當到하니 그곳 어느 스님이 受戒寺를 물음에 梁山 通度寺라고 對答하니 그는 말하기를 吾國의 戒脈이 언제 朝鮮에 傳해졌는가 듣건데 朝鮮에는 沙彌戒만 받아 僧伽가 되고 比丘戒는 授受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事實인가 함에 스님은 正色하고 言聲을 높여 空中의 日月이 어찌 汝國의 것인가 佛法은 天下의 公道이거늘 어찌 中國의 專有物로만 생각하는가 비록 나라는 大國이나 사람들은 小人이라고 詰責하였다. 그해 二月 서울로 돌아왔다. 一九◯九年 三月부터 海印寺 願堂庵에 彌陀會를 創設하여 禪淨一致를 唱導하였으며 그해 四月 十五日 結制 때 海印寺 大寂光殿에서 法床에 올라 良久하고 柱杖子를 一下한 다음 告衆曰 山僧이 不啻根鈍知淺이라 近日에 事煩하여 佛法에 頓無情況이어니 敎我說什 麽法고 我有眼如盲하고 有耳如聾하면 有鼻如塞하고 有口如啞하며 有身如枯木하고 有意如寒灰하나니 敎我說什麽法고 設余 眼不盲 耳不聾 鼻不塞 口不啞 身不枯木 意不寒灰인들 敎我說什麽法고 道道하라 余仰 不得己하여 說少許法하여 通箇消息하리라 楞嚴經云하되 決擇眞妄하여 以爲密因이라 하시니 諸人은 作麽生會오 學道人이 若馳求心과 知見情量心이 不歇하면 是爲邪見이요 不名學也니라 昔에 世尊이 在 靈山會上 坐 獅子座하사 百萬大衆이 圍繞러니 世尊이 忽無去處어늘 人天 百萬億 菩薩大衆이 各 以天眼으로 觀察十方하되 罔知 世尊 去處러라 彌勒이 觀察四衆하며 亦自決疑하여 問 文殊한데 文殊가 引古決疑하시니 此事는 非天眼으로 所可知也니라 擧如此等話四五則然後에 拈起柱杖하고 良久云 人人箇箇立千仞이라 到這裏하여 討箇甚麽오 士人은 讀詩書學禮義하고 農人은 日出而作 日入而息하여 鑿井而飮하고 耕田而食하며 工人은 出自家兩隻手하여 巧作千般奇物하고 商人은 行商也行商하고 坐商也坐商하나니 敎我說什麽法고 會麽아 不塗紅粉也風流니라 然이나 從上諸聖이 因五道歷四生이 爲此事也시며 畢竟悟得底도 亦悟此事也며 今日大衆이 同會道場도 亦爲此事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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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麽아 添脂着粉也無妨이니라 良久라가 擧起柱杖하고 拈放背後云會麽아 良久云 伽倻巍巍兮여 白雲片片이요 麥穗重重兮여 鶯歌滑滑이로다. 綠樹風淸兮여 芳草煙生이라하고 良久한 다음 吟古頌云 鐵牛對對黃金角 木馬雙雙白玉蹄 爲愛雪山香草細 夜深乘月過前溪 玉麟帶日離霄漢 金鳳含花下彩樓 野老不嫌公子醉 相將携手御街遊라 하였다.一九一◯年 河東 七佛禪院 祖室로 있으면서 大衆의 懇請으로 歸源正宗을 著述하였으니 이는 排佛政策으로 佛敎를 彈壓해온 儒敎와 西歐列强의 西勢東漸하는 물결을 타고 繁昌하는 西敎에 對한 近世 最初의 敎理的 闡明이었다. 이듬해 二月 上京하여 都城 內에 西敎의 敎會는 廣大嚴麗하고 尖塔이 높이 솟아 日曜禮拜時에 聽衆이 滿堂할 뿐 아니라 鍾聲 또한 錚錚하건만 佛敎의 寺院은 寂寞 無人함을 보고 이것이 누구의 責任인가 하고 痛歎한 스님은 入泥入水하며 入廛垂手하는 途中事를 決心하고 康永勻居士의 집에서 禪會를 열어 禪布敎의 旗幟를 들었으니 이것이 一般大衆을 向한 都市 禪布敎의 嚆矢이다. 이어 스님은 서울 鐘路區 鳳翼洞에 大覺寺를 세우고 一九一二年에는 大寺洞에 朝鮮佛敎 臨濟宗 中央敎堂을 세워 大衆布敎를 始作한 지 三年만에 三千餘 民衆이 雲集하였고 一九一三年 南泉, 惺月, 道峰, 石頭和尙 等 넷 스님의 發起로 禪學院을 세우게 된 것도 스님의 禪布敎에 影響을 받은 것이다. 大都市마다 禪布敎堂을 建立하고자 資金을 마련하기 爲해 一九一六年부터 北靑에서 金鑛을 運營하였으나 失敗하여 스님의 計劃은 霧散되었다. 그러나 傳統佛敎의 眞面目을 宣揚하는 大衆布敎를 通해 亡國民의 民族意識을 일깨워 祖國光復의 힘을 키우고자 한 스님의 뜻은 一九一九年 三月 一日의 己未獨立宣言으로 이어져 三十三人의 民族代表中 韓龍雲禪師와 함께 佛敎界의 代表로 參與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倭警에 체포되어서는 그들의 奸巧한 懷柔를 뿌리치고 마침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여 西大門 監獄에서 一年六個月間의 獄苦를 치루었다. 또한 北靑에서의 金鑛 事業과 延吉의 農場 運營은 內心으로는 獨立鬪士들에 對한 資金支援과 情報提供을 爲함이었다. 이러한 功勞로 一九六二年 政府로부터 國家功勞賞을 一九九◯年에는 國家로부터 錦冠文化勳章과 文化部로부터 한글저술과 譯經功勞로 感謝牌를 追贈 받았다. 스님은 出獄한 뒤에도 이 民族의 覺醒을 위하고 새로운 時代에 적응하는 佛敎의 理想的인 進路를 개척하고 民族文化의 根幹을 이루고 있는 韓國傳統 佛敎의 日本化 政策에 對抗하여 一九二一年에는 五十八歲의 白髮老衰와 目眩神昧에도 不拘하고 佛敎의 一大革新의 母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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