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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광산김공 휘 영조 묘갈명 병서 애국지사 광산김공이 휘는 영조 자는 영일 호는 가산이니 시조 휘 흥광의 37세손이다. 공의 15대조 휘 겸광은 순성 명량 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광성군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가 공안인데 이 분이 파조가 된다. 13대조 시은공 휘 의윤은 은덕 부사하고 화담 서경덕 소제 노수진 등과 도의 교분을 맺었다. 9대조 휘 승업은 충무위 상호군이다. 고조의 휘는 상원 증조는 휘는 기수 조의 휘는 재규 고의 휘는 승현이고 비는 고령박씨니 영록의 딸이다. 공은 외조 박공에게 수업하였는데 박공은 문경공 화서 이선생의 처 종손이며 문인이다. 이곳 정배리는 벽계와는 십리 거리로 선생이 여택재에서 문인들에게 위정척사를 역설하였는데 박공은 그 가르침을 받은이 중의 한 분이다. 외조의 가르침을 받은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호걸의 기상으로 의표가 중후하며 의기와 결단성이 있어 매사에 속임이 없고 불의를 좌시하지 않았다. 자손들에게는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성현의 도를 배우고 조상을 받들어서 사람의 근본됨을 잊지말라고 가르쳤다. 부모거상에 있어서는 예의와 슬픔을 다하였다. 모친이 병석에 누워 6년간이나 거동하지 못했는데 공이 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간병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부친 천장 시 이틀이 걸렸는데 공은 부친 유해를 위로해 드려야 한다며 곁에 곁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공의 효심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다. 경술국치 후 국가가 쓰러지고 민족이 압박과 착취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낼 때 공은 칠실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기미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 양평읍내 만세운동에서 정배리 책임자로 선봉에 나섰으니 그 기상이 어찌 장쾌하지 않으랴 공은 서울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엽우회 회원 이정보과 연락을 취하며 은밀히 거사를 준비하여 정배리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공은 숙부 민현과 외숙 박중빈과 함께 태극기를 채롱에 담아지고 읍내로 들어가 때를 기다렸다. 정오쯤 장터에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