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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전투지 조선 말렵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보다 한발 먼저 개발한 부국강병의 힘을 가지고, 조선 병탐의 야욕을 드러내 침범하여 왔으니, 이곳 선산읍성이 일본군에 점령당하여 그들의 주둔지가 되었다. 일보군을 격멸시키고자 선산의 동학농민군은 한물출 장군의 지휘 아래 단결하여 분연이 궐기하였다. 하늘을 찌르는 의기로써 첫 전투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쇠스랑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었으니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고 말았다. 아! 분개하도다. 그러나 그 의기 천추에 빛나도다. 갑오년 음력 11월 추위가 매섭던 그 해 겨울에, 선산의 동학농민군은 하늘을 찌르는 의분을 지니고 국권회복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낫 쇠스랑의 농기구와 몽둥이 죽창을 무기로 삼아 이들과 싸워 첫 전투에서 대승하여 격퇴시켰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이들 동학농민군은 조국을 지키고 위하여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애국애족의 투철한 정신을 발휘하였도다. 이 정신을 계승하고자 여기에 선산읍성동학농민군 승전공원을 조성하고 보국안민을 다짐하는 교육의 징표로 삼고자 한다. 2016년 4월 30일 동학후원회장 성암 김학광 짓고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유족회 회장 한명수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추진회 대표 오학수 세움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총지휘 한문출장군은 1894년(고종31년) 6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난동을 부린 갑오왜란에 대항하기 위해 그 해 가을 일본군의 침략 술수에서 말미암아 만행임을 확신한 섭정대원군 이하응의 심부름을 받고 허엽이 고향에 내려와 한문출장군을 만나 과거의 임진왜란과 갑신정변때 일본의 만행을 회상하며 일본제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공론이 확산되어 한문출장군이 직접 마을과 향교 서원을 통문돌아 선산갑오동학 창의병을 모집하야 11월초 재봉기하였다. 총지휘 한문출장군 생포 작전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그의 부인을 선산읍성에 칠일간 인질로 잡았다. 그 유인 작전에 한문출장군이 결려들지 않자 일본군은 그에게 저할 편지를 주며 부인을 풀어 주었다. 그 후 부인을 산골피신지에서 만난 부인을 훈계하며 편지를 읽지 않고 짚불에 태웠다. 2012년 11월 1일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안태윤 선산읍성은 조선갑오동학전쟁 선산창의(1894년)는 영남의 동학전쟁 성지이며 선산을미의병(1895년)은 영남 시발지입니다. 조선의 국권이 일본구에게 빼앗기자 회복하기 위하여 몸바친 선산갑오농민군과 선산을미의병의 피어린 투쟁은 한국의병사의 시작입니다. 자랑스러운 그 역사를 가슴에 새기면서 이곳에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 정신을 산 교육장으로 하기위해 갑오전쟁선산창의비와 선산을미의병효시지비를 참배합니다. 갑오전쟁 선산창의 11주년과 을산을미의병 114주년을 맞는 2009년 새봄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장 문학박사 임지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