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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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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광혜원면 광혜원리 34 상리사거리 앞 애국지사 윤병한 공적기념비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원래 이곳에 선생의 묘소가 있었지만 현충원으로 이장된 후 공적비가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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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한 선생은, 충청북도 진천(鎭川) 사람이다. 대한제국의 육군참위(陸軍參尉)로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군대가 강제해산을 당하자 의병에 참여하여 일제에 항쟁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인 진천으로 내려와 농민계몽의 몸바쳐 오던 중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광혜원(廣惠院)의 정관옥(鄭寬玉)·오은영(吳殷泳)과 의논하여 자신이 경영해 오던 회죽리(會竹里) 일대의 면유림(面有林)에 식목하는 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여 거사일인 4월 2일 식목작업중에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하고, 제일 먼저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정운화(鄭雲和)·남계홍(南啓弘)·백선옥(白先玉)·이영호(李榮鎬) 등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따라서 외쳤다. 이에 많은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마을 안을 행진하다가 만승면(萬升面) 사무소에 이르 러 면서기에게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면서 면사무소에 투석하고 곡괭이 등으로 파괴하는 동시에 인근에 새로이 건설 중이던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공사 현장의 건축자재 등을 폐기시키고 벽을 곡괭이로 헐어버리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튿날인 4월 3일 광혜원 장날을 이용하여 계속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꾀하여, 4월 2일 저녁에 면사무소를 찾아가 등사판과 백지를 제공받아 광신사(廣信社)에서 만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라는 경고문 등을 면사무소 소사인 박수문(朴壽文)에게 20여 매를 인쇄하게 하여 이날 밤 장터 요소 요소에 붙여놓게 하였다. 4월 3일 장터에 모인 2천여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던 중, 진천에서 온 10여명의 일본 헌병이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유치선(柳致先)과 그의 어머니가 적탄에 맞아 현장에서 희생된 것을 비롯하여 10여명이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를 낸 채 시위군중이 해산하였다. 4월 4일에는 진천으로부터 일본 헌병 20명이 증파되어, 광혜원 독립만세시위 주동자의 검거가 시작되어, 그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