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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5월31일 목요일 2 (제137호) 기 획 927년 정월, 견훤에 대해 소극적이던 왕건은 대공세에 나섰 다.왕건은왜갑자기견훤에대한대공세에나선것일까.이는 아마경애왕의친정과같은조치가작용한것이라믿어진다.9 27년 정월의 ‘출병’을 ‘군사를 보냈다’로 볼 것인지, ‘왕의 친 정’ 동아대학교, 역주븮고려사븯 세가1태조10년정월조 으로 볼 것인지 해석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중요한 순간마다 경애왕이 왕건에 대한 외교적 접촉을 재개했다는 점이다.925 년 음력 10월 16일븮고려사븯 세가1태조 8년 10월을해조, 926년 음력 4월 15일 븮고려사븯 세가1태조9년4월경자조경애왕의 종래 발언의 수위나 외교적 노력, 문면에 보이는 경애왕의 성정을 놓고 볼 때 당시 친정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경애왕은 견훤과 왕건 의 대립을 조장하기 위해 925년 견훤을 폄훼했다면, 926년에 는 왕건을 부추겼고, 이마저 여의치 않자 927년 경애왕이 친 정을 단행, 왕건과 연대하는 공격적 외교를 감행했다는 말이 된다.927년 1월 3일 경애왕과 왕건은 용주를 협공하여 함락시 키는군공을거두었다. 견훤(甄萱)이누차군사를일으켜고려의변방을침범하여병 탄(倂呑)하고자하였다. ( 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애왕4년정월조) 위의 자료에서는 927년 정월의 친정이 왕건의 결단인양 되 어 있으나 전년 4월 경애왕의 개전 권유가 있었고 신라의 출 병까지 있은 이상 어디까지나 연합 작전의 성격이 짙다.이 반 전은 고려 왕건과 신라 경애왕의 연합이 이룬 일대 쾌거이자 견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가져다 준 충격이었다. 이 는 고려-신라의 연합 세력이 견훤을 고립시키기 시작했음을 알리는단초였다. 경애왕은 거란에 이어 공격적 외교를 개시하기 시작했다. 경애왕은 일말의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음 달인 927년 2월 후 당에 사신 朴術洪을 파견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븮국역중국정사조선 전븯,2권,p.627. 이외 兵部侍郞 張芬,倉部員外郞 李忠式 등의 동 행이확인된다 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애왕4년2월조. 군사와 재무를 전담한 자들을 후당에 보낸 것은 경애왕의 관심이이에집중되고있었음을반영한다. 후당에의견사는경명왕대인924년 정월과 6월 후당에 사신 을 보낸 이후 3년 만의 일이었다. 경애왕은 이태 전 거란에 사 신을보냈었다.그러나후당에사신을보낸적은없다.새삼경 애왕이후당에사신을보낸까닭은무엇일까.후당의명종은9 25년 12월 견훤을 공식적으로 백제왕으로 책봉한 바 있다. 후 당은 견훤이나 왕봉규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견훤을 향한 군사 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경애왕의 견 사는 의미가 있다.이는 전년에 있은 견훤의 책봉과 관련이 있 거나 아니면 군사 공격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것과 관련이 있 을 것이다. 경애왕은 견훤과 왕건을 共敵으로 인식한 바탕 위 에서,각각을압박할수있는全방위외교를펼쳤던것이다. 927 년 3월 10 일 왕 건 은 운 주 를 , 사 흘 뒤 인 1 3일 에 는 금 품 성 을 차지했다.바야흐로전선은문경에서예천,상주로이어졌다. 이즈음신라내에서는모종의정치변화가있었다고짐작된 다. 다음의기록은이를상징하는것이라여겨진다. 3월 황룡사탑(皇龍寺塔)이 저절로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었 다. (븮삼국사절요븯 권14 경애왕 4년 3월조,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 애왕4년3월조) 왕건과 경애왕의 경북 내륙 연합 작전이 한창이던 3월 서라 벌 황룡사탑이 북쪽으로 기울었다. 황룡사 탑은 선덕여왕 당 시 창건된 이래, 신라 효소왕 7년(698) 6월 벼락을 맞았고, 성 덕왕 19년(720)때 개수를 마쳤다. 경문왕 8년(868년) 6월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그런 까닭에 이태 뒤 경문왕이 2년에 걸쳐 3차 개수를 마친 바 있었다. 이 탑은 고려 광종 5년(953 년)10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고려 현종 13년(1021)4차 개 수한 것이 확인된다. 븮삼국유사븯권3 탑상4 황룡사 구층탑조 . 기 록 대 로라면 경문왕이 개수한지 불과 57년 뒤 아무 이유도 없이 탑 이 기울었으며, 그 뒤 즉시 개수되지 않고 100년 가까이 방치 되었다는 셈이 된다.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위 기사는 사실이 나 현상이 아니며, 경애왕 4년 당시의 특정 정황을 전하는 은 유나암시일가능성이외려높다. 황룡사는 경문왕가 이래 왕실 행사의 거소였으며, 박씨 왕 실 역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그런 까닭에 황룡사 의 노승은 경명왕에게 성제대의 의미와 위치를 상세히 알려 주었고,경애왕 역시 왕위에 오르기 전 직접 이곳에서 백좌 강 회를열어아낌없는애정을표하며조력을얻기도했다. 그렇다면 황룡사 탑이 기운 것은 그간 기울여 온 황룡사와 박씨 왕실 간 돈독한 우의에 뭔가 중요한 변화가 있었거나,박 씨 왕실을 뒷받침한 황룡사의 견고한 정치적 받침이 반대세 력의 공격에 균열되었음을 뜻한다. 아니면 왕건과 경애왕의 연합 작전을 교란하려 한 반대세력의 교묘한 책동일 수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만 보면 당시 호사가나 반대 세력에 의해 이는 흉조로 인식된 것은 물론, 과장 선전되었을 가능성이 크 다. 어쩌면 반대세력은, 경애왕이 견훤을 대상으로 벌인 최대 의 공격 외교로 말미암아 신라의 운명이 이제 경각에 달렸고, 그 결과 나라의 안전을 상징하는 신라 3보의 하나인 탑이 기 울게 되었다는 역공을 펼쳤을 개연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 927년 3월 모종의 정치 변화가 있었고,실제 그 기류가 감지된 다면 경애왕이 일단 서라벌로 회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927년 3월 10일 왕건이 운주의 궁준을 간신히 제압하는데 그치고, 4월 9일 웅주 전투에선 패한 원인도 이에 말미암은것일수있다. 같은 달 후당의 명종은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 로 봉했다. 븮삼국사절요븯권14 경애왕 4년 3월조 그러나 후당이 재확 인해준 신라 남쪽의 독자 권력은 곧 고려 수군에 의해 무너졌 다. 927년 음력 4월 8일 왕건은 영창과 능식을 보내 강주를 공 략했다. 이 때 강주 인근의 전이산, 노포, 평서산, 돌산 등 4鄕 을 수중에 넣었다 븮고려사븯세가1 태조 10년 음력 4월 8일조. 하지만 이는 4월에 접수가 완료된 것일 뿐 작전의 개시는 훨씬 이전 에 추진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종합할 때 927년 정월 왕건의 경북 내륙에의 출병과 때를 맞춰 영창과 능식은 별동대를 거 느리고 송악을 출항,이어 서해를 종단했다고 보인다.이 수군 선단에는 7월 대야성을 공략하며 북진하게 되는 재충과 김락 을 위시한 군사들도 동승했다. 김락 등은 강주의 진수 병력을 남겨 둔 다음 북상했으므로 당시 선단의 규모는 일반적 상상 을넘는규모였으리라짐작된다 왕건이 나주의기근을구휼할때동 원한 규모가 3천이었으며 이 때 원래 있던 선단 외에 따로 步將 康瑄詰 黑湘 金材援 등으로 부 장을 삼아 배 100여 척을 더 만 들었는데 큰 배 10여 척은4방이 각16보로 위에望樓를만들고兵馬가달릴수있도록하였다. (고려사권1세가1태조).928년 강주를 진수한 장군으로 나타나는 유문과 원보 진경 또한 당시 동승했다. 븮고려사븯 권1세가1태조11 년 5월조. 왕건이 대규모 선단을 동원하여 남해안과 진주 일대 를 공격한 목적은 견훤의 서진 통로를 차단, 견제하는 동시에 남강을 거쳐, 낙동강을 경유, 김해평야의 군량을 운반할 수운 의확보에있었다고보인다. 한편경애왕은고려와후백제의세력에속한지역의고승들 을 서라벌로 초지,이들과의 연대를 꾀했다.개청은 명주 일대 에 영향력을 떨치던 고승이었다.또 그는 명주 최대의 군벌 순 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경애왕은 이 명주 보현산사 의 개청을 서라벌로 초치했다. 그런데 순식과 인근 주현의 관 리들이 이를 치하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로 보면 명주 세력 들은개청과경애왕사이의연대를반겼다는의미가된다.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개청이 순식과 연결되어 있은 까닭 으로 그가 서라벌로 초치되었을 개연성이 무엇보다 크다 경애 왕이 일개인의신심에서고승을초치했다고볼 수도있다.하지만 당시일 각일각 다가오는 나라의 위기를 고려할 때 호사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경애왕은 개청과의 연대를 통해 순식과 의 유대를 꾀해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이는 왕건이 고려 왕궁 의 내원 승려로 있던 許越을 통해 순식을 설유한 것과 비교된 다. (븮고려사절요븯 권1 태조 신성대왕 5년 7월조). 당시 순식이 가진 군 사력은 경애왕에게 큰 매력이었을 것으로 본다. 경애왕은 또 명주 박씨였던 지회 곧 혜거국사를 서라벌 분황사에 초치했 다.븮갈양사혜거국사비븯,역주나말려초금석문하,pp.460-461. 혜거 국사는,766년 진표 율사가 창건한 곳이자 법상종의근 본 도량인 전북 김제의 금산사를 필두로,전북 익산의 미륵사, 전남 선운산 등에서 수도와 설법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곳들 은 모두 후백제의 지역이다. 혜거는 이 지역에서 명성을 날렸 다.이렇듯견훤과밀착되었으리라짐작되는혜거를경애왕은 분황사에 초치했다. 실상 견훤과 왕건은 불교를 통한 민심 확 보 경쟁에 있었다. 경애왕은 양자의 경쟁을 꿰뚫고 있었고 그 역시 개청과 혜거를 서라벌로 끌어들여 이들 노력을 분쇄하 려했던것이다. 경애왕의최후를묘사한기록은그가포석정에서주연도중 견훤에게 사로잡혀 피살당했다고 한다. 양력 12월이란 한겨 울,적군이 영천까지 와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주연을 베 풀 정신이 도시 가능한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상식처럼 되어 있듯, 경애왕이 하루하루 술에 절어 방종을 일삼았다면, 최소 한 견훤은 목숨까진 무참히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또 신라를 병합하려는 의도에서 그러했다면 왕을 죽이고, 실리에 밝은 김부 같은 인물-실제 김부는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견훤을 버렸고 왕건에게 투항했다.- , 을 구태여 옹립하는 모험까지 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경애왕의 비극적 죽음이 던져주는 의 문점들의출발은대략이런것들이었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경애왕은 거란, 후당, 고려 등 全방 위에 걸쳐 공격적 외교를 구사한 흔적이 보인다. 그 과정에서 경애왕은 왕건에게 견훤에 대한 결전을 요청하기도 했고 견 훤에 대한 직설적 화법의 비난과 공격을 쏟아내기도 했다. 또 순식이나 견훤의 거점과 연결된 불교 승려를 초치해 자신의 遠略을펴려한흔적도보인다.죽기열달전엔왕건과더불어 백제의 세력권을 함께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으로는 견훤이, 왕을 때려죽인 弑逆의 죄인,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 은 천치, 이 양자의 굴레를 자청한 까닭을 풀어낼 길이 없다. 견훤이 927년 11월, 자신의 행동으로 자칫 그간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을 줄 번연히 알면서 경애왕을 죽이고 비빈마저 겁간 하는 등, 무득한 일을 감행한 데는 필시 또 다른, 나름의 곡절 이 있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왕을 죽여 천하의 공분을 사고 명 분마저 잃을 예후를 알면서도 견훤이 그것을 감행한 까닭이 궁금하지않을수없다. 그것은경애왕이취한그동안의노선이나제반노력이그만 큼 견 훤 에 게 심 각 한 중 압 감 을 심 어 주 었 으 며 그 정 신 적 고 통 과 울분이 이성의 선에서 미처 제어되지 못한 채,마침내 극단 으로 치닫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결국 이상에서 필 자가 밝힌 경애왕의 조치 외에,따로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경 애왕의 노력이 분명 있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경애왕의 최후를명료히설명할수없다는말과같다. 이런 경애왕의 노력들이 일실된 데는 왕건의 역할이 큰 몫 을 했다고 여겨진다. 지금껏 논자들은 왕건을 반역자의 입장 에서 보지 않고 승리자의 입장에서 주로 보아 왔다.그러한 인 식의 태도와 방법을 고수하는 한, 왕건을 왕건으로 제대로 볼 수 없으며,경애왕을 둘러싼 의혹과 당대의 시대 상황 역시 제 대로 파악할 수 없다.왕건은,숱한 중폐비사나 토호들의 기득 권 인정에서 확인되듯,통일 전쟁을 거래로 보았고,거래의 방 법에서 통일 전쟁의 해법을 찾았다. 사료에서 간취되는, 전쟁 을 주장한 유금필과 거래를 고수하는 왕건의 갈등은 어쩌면 이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왕건이 이면 거래를 통해 尊王의 신라지역에서 歸附받은 무수한 군현의 수치가 입증하듯, 왕건은 유지가 아닌, 타도의 관점에서 신라에 접근 했다. 왕건은 경애왕과의 동맹 역시 전혀 심각하고 진지한 수 준에서검토하지않았다. 왕건과 견훤은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共敵이었다. 경애왕 역시 왕건과 견훤을 동치시켜 이해했고 진정한 동맹자로서보 다는이이제이의대상으로간주했다.경애왕은왕건에게수차 견훤과의 결전을 요청해 양자의 상호 대립을 꾀한 것 역시 이 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이에 적극적으로 호흡을 맞춘 왕 건의 대응 역시 927년 단 한 차례를 빼곤 없다. 전쟁을 거래로 보는 한, 그는 결코 경애왕에 대해 존왕의 예를 취할 수 없었 고, 또 실천할 수 없었다. 경애왕의 요청은 왕건에 의해 번번 이, 또 철저히 무시당했다. 왕건은 경애왕에게 최악의 동맹자 였고, 끊임없이 영토를 잠식해오는 위협자였다. 그럼에도 죽 는 순간까지 경애왕이 내부의 숱한 반발에 직면해 나라의 운 명 을 외 부 의 왕 건 에 게 의 탁 해 야 했 던 것 은 약 소 국 신 라 의 왕 이 가진 비애였고,나라의 안전과 쇄신을 도모하려 한 그의 실 천정신에말미암은불행이었다. 왕건은전형적장사꾼의견지에서신라만넘겨받을수있다 면 그 상대가 김부이건, 경애왕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왕건에 겐 처음부터 충심도 없고 정의도 없었다. 왕건의 관심은 신라 차지였고, 그러한 관심을 교묘히 확장시켜 갔다. 이런 맥락에 서 결과적으로 왕건은 경애왕 죽음의 진실을 덮었고 대신 자 신에게 신라를 넘겨준 김부에게 애민과 구휼의 군주라는 영 광을 덧씌웠다. 936년의 諸기록에서 一貫되이 보이는 경애왕 과 김부의 대비는 선악의 구분에 가깝다. 그럴수록 이는 올바 른면모의역사상이아니다. 견훤에의해신라왕으로옹립된김부는신라를왕건에게넘 긴 순간, 변절의 대가로 왕건의 사위가 되었다. 또 신라 백성 을 왕건에게 넘긴 대가로 천수를 다하도록 세속의 부와 영광 을 누렸다. 이른바 936년 김부의 신라 양도와 낙랑공주(왕건 의딸)의김부에의사여는왕건이펼친거래의결정판이다.위 두 사건이 맞물려 동시성을 가지고 있음은 사전 거래와 밀약 을 적나라하게 입증한다. 대신 신라 멸망의 모든 책임은 김부 의 前王 경애왕에게 전가되어졌다. 그리고 포석정 사건의 진 실은 왕건이 주창한 거래의 끈끈한 사슬에 의해 오래오래 은 폐되었고 고려 왕조 내내 왜곡되어졌다. 견훤에 이어 왕건과 차례차례 결탁한 김부는 경애왕이 죽은 지 51년이나 더 세속 적 삶을 향유하다 서라벌 밖 고려에서 죽었고,서라벌 밖 경기 땅에 묻혔다. 설사 김부는 신라왕의 권좌에 앉기를 念願했고 일면 그 염원을 한때나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 다. 그러나 설령 그러하겠으되, 끝내 신라왕으로서의 삶은 스 스로 포기했다. 그의 시호 경순처럼 그는 천년 사직의 정신과 기개를 포효한 신라왕이 아닌, 외려 時宜에 따라 왕건에게 충 견처럼 순종한, 왕건의 사위였을 뿐이다. 사실상 신라의 기상 과 정신은 927년 11월 포석정 사건이 있은 그날 완전히 지워 졌다.이날신라는처음부터끝까지하나남김없이멸망했다. 김 부 가 거 래 를 턴 결 과 왕 건 은 김 부 의 백 부 김 억 렴 의 딸 과 혼인했다. 그 피를 이은 현종이 고려왕으로 등극한 이래 고려 의 왕들은 김부와 김억렴의 혈손을 꼬리표처럼 달며 세상을 지배했다. 경애왕의 죽음과 포석정의 비밀을 풀 고삐는 이후 영원히풀려버린것이었다. 경애왕죽음과관련하여김부의내응을짐작케할단서로다 음의 두 자료가 주목된다.기록은 경애왕을 따르던 군신,비빈, 종척, 사녀, 공경, 대부들을 죄다 죽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것은전쟁에서도좀체보기힘든집단학살의범주에속한다. 지성소인포석정에서행해진광란의살육은,지성소인포석 정에서 술판이 벌어졌다는 주장만큼, 파격적이며 희대의 엄 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대개 자신의 적수에게 분노와 적의를 표하고, 살육을 행하는 것이지, 적수가 되지 않을 사람들에게 는 너그러운 면모를 보여주기 마련인데, 위협조차 되지 않을 무리까지 무차별 학살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주목되는 사실 이 아닐 수 없다.더불어 원한과 분노로 죽였다면 주검을 묻지 않고 서캐나 새떼의 밥이 되도록 그냥 둘지언정, 굳이 함몰, 즉매장의수고를감수하지는않는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한 무차별 학살극, 나아가 죽은 이들을 다 함께 흙구덩이에 함몰한 것은 보기 드문 대범한 시 나리오이다.장소 역시 서라벌 왕도의 안,그것도 지성소인 포 석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 경애왕에 대한 원한이 깊고 절실한 나머지 왕의 주변 세력을 전부 도말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경애왕 시해와 관련하여 목격자들의 일체의 전언, 내막을 입막음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그도아니면양자를합친복합적이유일수도있다.분명 한 것은 이러한 행동을 주도하여, 저지른 인물은 냉혈한으로 서,경애왕 일당에게 오랜 기간 깊은 분노,숙원이 쌓여있었다 는 전제 하에서만 위의 현상은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 실이다.견훤이경애왕을적수로간주하여적의를품었을지언 정, 완산주의 견훤이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경애왕의 말단 시 종, 무력한 아낙네에까지 거친 분노, 살의를 지녔다고는 도저 히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러한 적의와 분노를 담은 행위를 행하였을 만한 인물은 누구일까. 경애왕의 권력 핵심에서 멀 리도 가까이도 아닌 어정쩡한 지점에서, 이를테면 서라벌 왕 도 안에서 경애왕 일당에게 핍박받고 압제와 견제를 당했던 김부를 주범으로 상정한다면, 위의 잔인하고 기묘한 학살극 역시납득이가능해진다. 요컨대 1)경애왕은 효종(김부의 부)의 세력권, 포석정에서 운명이 갈려졌고, 2)효종(김부의 부)의 세력권으로 일컬어지 던 해목령에 육신이 묻혀졌다. 경애왕은 효종의 세력권에서 비극적 운명의 최후를 맞이하고 묻히게 된 셈이다. 나아가 3) 경애왕을이어김부(효종의아들)가견훤의후광아래권력을 잇고 있다.이들 3개의 사건이 우연적으로 연속해서 발생했을 가능성은거의없다고보인다.이들3개의사건들은우연을가 장한 필연의 고리 속에서 깊은 인과 관계, 혹은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있다고판단된다. 가-3)敬順王立. 諱傅, 文聖大王之裔孫, 孝宗伊豫之子也, 母 桂娥太后.①爲甄萱所擧卽位.②擧前王屍,殯於西堂,與③群下 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븮삼국사기븯 권1 2신라본기12경순왕원년조 가-4)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逋(通)謁. 王與 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於臨海殿, 酒게, 王 言 曰 , “吾以不天,① 致禍亂,②甄萱恣行不義,③喪我國家,何痛如 之.” ④因泫然涕泣. ⑤左右無不嗚咽, ⑥太祖亦流涕慰藉. 因留 數旬 駕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5년2월조 위의자료에는견훤이김부를전격적으로옹립한것이담겨 있다.위의자료가-3)①에서김부옹립,가-3)②에서빈당,가 -3)③애곡이차례로보인다.경애왕의주검이매장되기전,김 부는 군하를 거느리고 애곡하고 있다. 경애왕을 따랐던 군신, 종척은포석정에서죄다죽었는데,김부는자신의무리와더불 어 경애왕의 주검에 애곡하고 있다.위의 자료 가-1)에서 보이 는군신이김부와더불어태연히빈당에나타났다고보기는어 렵다.요컨대가-3)의군하는김부의일당,측근이라보아야할 것이다. 충분한 사전 내정, 준비 작업이 없었다면 이러한 신속 한 왕위 계승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이러한 신속한 권력 승계 는 경애왕 거세와 관련하여, 김부가 견훤의 주문, 예상에 충실 히 응답하였고, 그 결과 견훤의 신속한 비준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보인다.곧 김부의 ‘권지국사’임명은 철저한 사전 내정 과 준비는 물론이고, 경애왕 죽음에 대한 논공행상, 내응의 충 실한역할에대한견훤의보상이었다고도보인다. 견훤이신라왕으로즉위하지않은까닭은명분에앞서,즉위 하지 않아도 신라를 부용국, 혹은 괴뢰정권으로 지배할 수 있 다는 자신감과 뚜렷한 나름의 근거를 갖추었기에 가능한 것이 었다.경애왕 거세에 내응을 한 김부는 ‘시군’의 정치적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또한 견훤의 힘에 의지해 김부는 ‘권지국사’ 가 되었다. 견훤에게 있어 김부는 향후 필연적으로 친견훤의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비쳤다고 보인다. 이를테면 충실한괴뢰정권의구성요건을갖춘정권의탄생이었다. 가-3)②,가-3)③에서 김부는 경애왕의 주검을 서당에 안치 하고 군하들과 더불어 통곡하고 있다. 김부의 통곡이 과연 김 부의 진심일까. 김부와 경애왕은 이종사촌의 관계라고는 하 나,엄밀히 정치적 숙적의 관계에 있었다.그런 김부의 입장에 선, 경애왕의 주검을 놓고 박장대소했으면 했지 결코 애곡했 을리없다.결국김부의애곡은민심을염두에둔철저한연출 이었고, 보다 정확히 그런 연출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고 정 의할 수 있다. ‘김부의 애곡’ 자체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또 다 른 까닭은 김부가 경애왕의 주검을 서당에 안치, 애곡했던 시 점은 견훤이 서라벌 궁궐에 머물러 있던 시점이었다. 경애왕 을 적시했던 견훤이 머문 곳, 궁전이라고 하는 동일한 공간에 서,견훤에 의해 옹립된 김부가 다름 아닌 견훤의 주적 경애왕 을 위하여 애곡했다는 것부터 앞뒤가 도저히 맞지 않는 일로 서,심각한언어도단이아닐수없다. 가-2)역시 평소 김부의 눈물이 지닌 진정성에 의문을 품게 한다. 가-2)의 시점은 931년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한 때로서, 직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견훤을 격파하며 대세가 왕건에 게 급격히 기울어진 즈음이었다. 이에 김부는 왕건의 입도를 적극 요청하였고, 왕건이 부응하면서 둘의 회합이 성사된 셈 이었다. 이 임해전의 회합에서 김부는 견훤의 만행을 얘기하 며왕건에게눈물을보였다. 927년견훤의서라벌침입,그로말미암은혼란의와중경애 왕이 거세되었다. 경애왕을 뒤이어 김부가 견훤에 의해 옹립 되었다. 그런 만큼, 김부는 견훤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최대의 정치 수혜자였다. 견훤의 침입, 지지, 후원이 없었다면, 당시 신라의 정국에서 김부는 절대로 박씨 세력을 제치고 ‘권지국 사’가 될 수 없었다. 김부 자신에게 있어서, 엄밀히 견훤은 가 장 결정적인 정치 재기의 발판을 선물한 장본인이자 은인이 었다. 까닭에 927년 견훤의 서라벌 침입이야말로 김부에게 있 어서 禍亂이 아닌 집권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 다.견훤의 힘에 의지해 왕이 된 김부가 견훤을 비난하고 부정 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자기모순이자 자기 부정이다. 혹여 김부가 서라벌의 안위와 민생을 염두에 두고 견훤을 적시하 고, 憂民의 눈물을 흘렸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망국의 과정에 서보인그의행위에서설득력이떨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김부의 발언 가-4)‘①’은 중대한 사실 을 함의하고 있다. 이것은 견훤과의 내응 사실을 왕건에게 토 로하고 눈물로써 왕건의 이해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견훤의 악행을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향후 친왕건의 노선을 택하겠다 는선포였다고보인다. 김부의울음에맞춰함께울었다는왕건도진정성이의심스 럽다.931년 고창 전투에서 확인되듯 왕건은 경애왕의 애도를 표방한 재지세력의 지원을 받아 승리했다.김부가 927년 견훤 의 침입에 따른 반사이익을 즉각 누렸다면, 왕건은 927년 견 훤의 서라벌 침입에 따른 반사이익을 4년 만에 누렸다. 둘은 경애왕 죽음의 반사 혜택을 톡톡히 누렸고, 은연중 경애왕의 죽음을 바랐으며, 직븡간접적으로도 경애왕의 죽음에 관련이 있었다. ▶다음호에계속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7) Ⅰ.927년정월의대공세 뱚Ⅱ.경애왕의위기와왕건의움직임 뱚Ⅳ.경애왕의치세와기록의어그 러짐 박 순 교 뱚Ⅲ.경애왕과불교세력 뱚Ⅴ.김부의내응과집권 목 차 Ⅰ.927년정월의대공세 Ⅱ.경애왕의위기와왕건의움직임 Ⅲ.경애왕과불교세력 Ⅳ.경애왕의치세와기록의어그러짐. Ⅴ.김부의내응과집권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