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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기념비 주의 보혈로 세워진 우리 만경교회가 민족의 수난 육이오로 참화를 당하였으니 목사님을 비롯하여 장로님 집사님 청년 모두 열다섯 분이 순교하셨다. 1950년 7월 19일 공산군이 만경에 진주하여 급기야 교회당이 점령당하며 강단에 붉은 기와 그들의 사진이 걸리고 9월 12일에는 목사님과 장로님 반공혁명단원 청년들이 체포되어갔다. 9월 26일 추석날 새벽에 그간 일시 석방 되었던 목사님과 장로님 집사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우들을 감금하기 시작하더니 9월 27일 영시를 기하여 참혹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9월 28일 수복이 되었어도 교회와 만경 읍내는 공포에 쌓였고 9월 29일에야 그간 울리지도 못하던 교회의 성종을 오래도록 울렸다. 그러나 끌려간 분들의 소식은 알 수 없다가 10월 1일에야 내부 분소 지금의 지서의 우물 두 곳과 방공호에 매몰된 오십구가 넘는 많은 시신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순교하신 열 분의 시신을 찾았는데 형언할 수 없이 참혹한 모습이었다. 황해도 출신이며 조선 신학교를 졸업하시어 1948년 5월부터 만경교회에서 시무하시던 김종한 목사님, 양손을 뒤로하여 엄지손가락에 굵은 철사 줄로 묶인 강성진 장로님과 그 아드님이신 강춘길 집사님, 이남은 성도님, 한 살의 아들 송창호 군을 안은 최남인 집사님과 그 시어머님이신 유상덕 집사님, 그리고 반주자 이옥진 선생님과 그 사모 이정순 집사님 등의 시신을 만경지서에서 수습하였는데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큰 망치로 뒷머리를 맞거나 죽창에 옆구리를 찔린 채로 우물 속에 던져진 후 떠오르지 못하도록 구들로 쓰던 넓고 무거운 돌로 눌린 후 매몰되었거나 방공호 속에 넣은 후 무너뜨린 흙 속에 묻혀 있었다. 한편 고동순 집사님은 몽산에서 시신을 수습하였고 신학생이었던 최정열 선생의 부인인 이옥진 선생님은 임신 7개월이었다. 9월 11일 끌려간 반공혁명단원 중 최정열 곽옥정 유금식 송은숙 등의 반사 선생님들과 곽병일 집사님은 묘라리에 있던 공산군 중대에서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한 후 바로서기조차도 힘든 몸으로 전주형무소까지 걸려 끌려가서 아름다운 젊은 나이에 총살당한 후 시체를 수습할 수 있었다. 순교하신 시신들은 장산리 국유림지에 안장되었고 11월 2일에는 온 교우들과 가족들의 통곡 속에 15인 순교자에 대한 합동 추도 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목자와 애틋이 사랑하던 가족을 잃은 상처 입은 양들의 통한의 눈물 바다였으며 그 피폐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애석하고 분통함을 어찌 다 말 하리오. 다만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십자가를 지고 수난 속에서도 생명을 다하기까지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심을 믿으며 그 거룩한 순교의 뜻을 기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순교 사업부가 만경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힘을 합하여 삼가 기념비로 세웁니다. 주후 2009년 5월 19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