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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련 선생은, 전라북도 전주(全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의 전주 장날을 이용하여 이운영(李云泳)·김봉추(金鳳樞)·김진영(金鎭永)·강선칠(姜善七)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기독교·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을 눈치챈 일본 경찰은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일부 주동자를 체포하고 각급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는 등 삼엄한 경비망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신흥(新興)·기전(紀全)학교 학생을 동원하여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였고, 천도교측에서도 교구실에서 수천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각지의 교도들에게 13일의 만세시위 계획을 연락하였다. 이때 그는 최종삼(崔宗三)·유병민(劉秉敏)·김한순(金漢淳)·함의선(咸義善) 등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등사하였다. 거사 예정일이 다가오자, 시위계획을 미리 눈치챈 일본 경찰·헌병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3월 13일 정오, 기독교도·천도교도·학생이 중심이 된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이 공립제2보통학교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대화동(大和洞)을 거쳐 우편국까지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경찰과 우체국 앞에서 대치하여 승강이가 벌여졌다. 이때 시위군중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자, 일제측은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그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8월 2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